여성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연대’를 어려워하고 집단 내 분열이 쉽게 일어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반대로 남성의 결속을 쉽게 만들어주는 동력이 단순히 성별의 성향차이라고 생각하는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들이 그토록 동성애를 혐오하고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왜 시민계급사이에서 미소년을 상대로 한 동성애가 유행했을까? 서양의 ‘살롱연애’ 문화를 없애고 아시아의 ‘축첩제도’를 없앤, ‘부부 사이의 절대적 에로스’를 추구하는 현대의 결혼제도는 과거의 그것보다 과연 더 합리적인 지향점일까? 자신의 분신에게 무의식적으로 성적 사랑을 느낀다는 남성의 ‘피그말리온 콤플렉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10대 소녀들이 성매매를 서슴지 않는 행동의 이면에는 어떤 심리가 감추어져 있는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개인적인 성향, 혹은 성별의 차이 문제로 생각해왔던 모든 의문들을 속 시원하고도 한꺼번에 풀어주었던 놀라운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 대해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욕실에서 읽다가 ‘유레카!’를 외치고 벌거벗은 몸으로 뛰쳐나올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책의 제목이 다소 공격적이어서 래디컬 페미니즘의 성격을 띨 거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이 책은 ‘젠더’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사회적인 현상의 이면을 깊이 있고 통찰력 있게 풀어낸 최고의 인류학서이자 뛰어난 지적 교양서라고 얘기하고 싶다. 저자가 거침없이 얘기하는 개념이 쉽지 않고 하나의 학술에 대한 전문서적을 읽는 느낌이지만 너무 재밌어서 마치 소설을 읽듯 후루룩 읽어나갈 수 있었던 책.
이 사회에 ‘젠더’ 개념이 작동하는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기반에 주체적 성을 점령하고 있는 남성이라는 성과 그 성에 의해 객체화, 타자화 되어 버린 여성이라는 성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가부장적 사회가 타자화시켜 놓은 객체, 즉 여성이라는 성이 남성에 의해 ‘삽입되어지는 수동적인 성’이라는 직설, 이 다소 충격적인 개념을 뼛속 깊이 내재화 하고 있는 남성간의 동맹을 저자는 ‘호모소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호모소셜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이 동성애를 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성애에서는 반드시 ‘삽입 당하는 남성’, 즉 여성성을 자처하는 남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의 성적 주체성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일이자 ‘호모소셜’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므로 의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그들 사이에서 남성 중 한 명이 ‘성적 객체’로 전락하고 마는 행위가 된다. 저자의 이러한 논리와 설명으로 비로소 그들의 동성애 혐오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싫은가 보다.’와 같은 막연한 추측에서 마치 일순간에 안개가 걷혀진 실체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분, 호모소셜을 토대로 하는 동성애의 혐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앞서 얘기했던 여성의 객체화와 객체화 된 대상에 대한 멸시를 넘어서는 혐오를 저자는 ‘호모포비아’로 규정짓고 있다. 호모소셜은 호모포비아를 통해 더 견고해 진다. 동성애는 남성 중 한명이 스스로가 열등한 존재, 즉 혐오의 대상이 됨으로써 그들의 주체성과 ‘남성됨’을 훼손시키는 일이 된다는 설명, 너무 시원스럽지 않은가.
그러면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유행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스에서는 섹스에도 등급을 나누었는데 (소고기인가? 등급을 나누게), 그 중 최고는 시민계급인 성인남성과 시민계급인 미소년과의 섹스, 그 다음은 시민 성인남성과 노예남성과의 섹스, 가장 낮은 등급으로 취급했던 섹스가 바로 성인 남성과 여성의 섹스였다고 하니, 처음엔 이들이 과연 제정신인건가, 싶었다. 그러나 호모소셜과 호모포비아를 이해하고 나면 이 현상 역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객체화된 성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소년은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스스로 주체적인 위치에 설 수 있게 되므로 이들이 어린 나이에 제공하는 성은 ‘미래의 자기 모습’인 연장자 남성에게 바치는 자발적인 행위가 된다. 이들이 한 때 수동적으로 성을 제공했다고 하여 영원한 성적 객체로 전락하는 일 따위는 없으므로 미소년과의 동성섹스는 혐오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신성한’ 무언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라는 설명은 놀랍게도 역시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여기서 ‘남성’이라는 성 자체가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안전장치로 작동한다.
그리스의 동성애 현상을 근거로 동성애도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라고 누차 강조했었던 레즈비언 지인이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리 유쾌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남성이 추구했던 동성애는 ‘호모포비아’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성애는 ‘수동성’이라고 규정해 놓은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혐오를 토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성이 여성화되는 위험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동성애 행위를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소년애이다.’
책에서 나온 이 문장은 고대사회의 불가사의했던 동성애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대목이었다.
저자는 ‘혐오’를 매개로 뭉치는 ‘호모소셜’한 남성의 연대가 모래성과 같은 약한 토대 위에 존재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이 생각에 오히려 의문을 품는다. 누군가를 공공의 적으로 두는 연대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직장에서 누군가의 험담으로 맺어진 동료관계가 그러하고 집단따돌림의 가해자쪽에 서 있는 집단일수록 그들의 연결고리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저자도 얘기했듯이 스스로를 우위에 두고 ‘성적 주체자’임을 자처하는 남성들의 세계에서는 남성으로부터 인정받는 ‘사회적 성취’ 하나만을 추구하면 그만이므로 그들의 인생은 여성보다 훨씬 심플해 질 수 있다. 그들에게 여성은 자신의 존재를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 사회적 성취를 얻어냈을 때 자연스레 딸려 오는 부산물, 트로피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 성차별이라는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 여성은 자아실현이라는 ‘사회적 성취’와 더불어 남성에게도 인정받아야 하는 ‘여성스러움’을 함께 지향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바로 여기에서 여성들의 분열이 일어난다. ‘페미닌’을 스스로의 가치 기준으로 두는 여성 집단과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혐오와 갈등이 존재하는 건 뻔한 일 아닐까. 그 뿐인가, ‘페미닌’ 집단 내에서도 분열은 역시 존재한다. 평가의 주체가 스스로가 아닌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여성의 세계에서는 ‘호모소셜’이 성립되기 어렵다. 이 사회에서 객체, 타자로 머물러 있는 한은 그렇다.
‘남자는 남자들의 집단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 남성이 된다. 이에 반해 여자를 여성으로 만드는 것은 남자이며 여성됨을 증명하는 것도 남자들이다.’ (책 중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그녀의 비범한 통찰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토론 모임에서는 모두가 알만한 큰 규모의 다양한 남성커뮤니티에 비해 왜 여성 커뮤니티는 유독 뷰티와 육아 커뮤니티 외에 이렇다 할 만한 커뮤니티가 없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이 질문은 바로 여성 집단이 강력한 ‘호모소셜’을 이루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궁금증을 이 책을 통해서 해소할 수 있었다.
작가가 설명하는 구조와 헤게모니를 제대로 간파하고 이해하는 자만이 비로소 성평등을 제대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새삼 ‘탈코르셋(외모지향주의와 ’여성스러움‘ 등의 사회적 통념과 일체의 여성억압을 거부하는 행위)’을 지향하며 노메이크업과 숏커트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여성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지고 있다. 그들이 이 책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던, 그렇지 않은 사람이던, 강력한 사회통념과 가치에 맞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할 얘깃거리가 정말 많다. 난이도도 있는 만큼이나 흥미롭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