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리뷰3
아주 옛날, 스타크래프트를 잠깐 했었지만 게임에는 정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지금은 카카오게임사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는 ‘오딘’이라는 게임 명을 듣고 이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유럽 바이킹 족이 섬기는 신들이었던 토르, 오딘, 로키, 프레야 중 ‘오딘’이라는 이름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저 개인적인 취향이자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그 외에 대한 사항에는 관심조차 없고 그저 전쟁게임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그러나 단 하나, 이들이 홍보용으로 내 놓은 게임캐릭터의 모습에는 상당히 관심이 많은 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릭터가 입고 있는 의상을 유심히 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전 직업에서 기인하는 병은 아니다.) 여성캐릭터의 그래픽 앞에서는 지나가다가도 멈춰 서지만 그건 의상이 예쁘거나 멋져서가 아니라 애석하게도 짜증과 오심이 뒤섞인 부정적인 관심 때문이다.
‘옷 좀 제대로 입힐 수 없어?’
전쟁 중에도 가슴의 반은 내놓고 배꼽과 허벅다리 노출은 필수인 듯 아슬아슬한 뷔스띠에와 슬릿스커트를 걸친 여성전사들, 저 상태로 무슨 전쟁터를 나간다는 말인가? 터질 듯 큰 가슴과 빵빵한 골반, 탐스럽게 묘사된 말벅지 등이 마치 여성전사의 필수 신체조건이라도 되는 양,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뿜뿜 뽐내며 서 있는 전사들의 얼굴이 한없이 청순한 건 또 반전이다. 완벽한 풀 메이크업을 하고 서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맑은 유리알 피부와 가련한 청순미는 결코 가려지지 않는다.
‘만약, 한국의 모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군 입대의 의무를 지게 된다면 성 평등에 한 발 가까이 갈 수 있을까?‘ 그 동안 수도 없이 생각해 왔던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이 게임 캐릭터 하나 만으로 답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정희진 작가 또한 책 속에서 명쾌한 답을 주고 있다. 남성이 바라는, 혹은 판타지로 품고 있는 ‘군입대한 여성상’이 ‘게임 속 여전사’의 이미지와 과연 얼마나 다를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무기를 들고 있는 전사조차 섹슈얼리티에 갇혀 있는 캐릭터의 모습은 남성들이 품고 있는 모든 여성들의 여성상 그 자체이자 ‘성적 모욕, ’성차별’의 한 단면이다.
모든 차별은 계급의식에서 온다. 계급은 부의 차이나 혹은 사내의 직급 서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연상의 연인에게 죽어도 높임호칭은 쓰기 싫고 반대로 자신이 단 한 살이라도 많은 입장이면 ‘오빠’라는 호칭에 목을 매는 남성의 심리는, 성별 지위 상 남성우위를 당연시 여기는 ‘성별 계급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그들의 눈에는 그저 인격과 성의 객체이자 타자, 계급적 열위에 있는 대상일 뿐이다. 가부장제의 헤게모니와 굴러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이면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있는 계급화 된 성 권력과 그로인한 성폭력의 일상화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군내의 성폭력, 성추행 사건이 곪을 대로 곪아 최근에야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일은 그래서 놀랍지 않다.
전시마다 점령지역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윤간‘과 같은 역겨운 범죄는 남성들의 성욕에 고삐가 풀려서가 아니다. 적군의 여성들을 강간함으로써 적군 전체를 ’성적객체화‘,즉 ’여성화‘ 시키고 그로 인한 굴욕감을 안겨 주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행동이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뼈아픈 모멸감을 주면서 동시에 승리감을 더욱 고취시키는, 그들에게는 이것이 강력한 ’승리의례‘가 되는 행위이다.
군대 내의 동성 성폭력에서, 가해자의 위치에 선 남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별 타격을 입지도 않는다. 여기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쪽은 피해자 남성인데 이는 수동적으로 성폭력을 당하는 입장이 ’여성화‘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남성간의 동성애를 혐오하는 맥락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남성 세계에서 ’성과‘ ’폭력‘이라는 개념이 서로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있는가를 알고 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작가는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 문제를 ’남성 중심의 군사주의가 저지른 성폭력‘이라고 보는 쪽이지, 단순히 국가 간의 갈등, 식민지에게 가하는 폭력의 문제라고만 보지는 않는다.
직업 군인 내의 여성 군인 직책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전산, 간호와 같은 ‘여성직종’에 격리되어 근무한다고 한다. 작가는 책에서 ‘국군간호사관학교의 여군들은 군인이 아니라 ’병사들의 어머니‘고 간주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이 전차를 타면 전차가 내려앉는다는 속설로 인해 여군은 전방이나 전투지역에 근무할 수 없고, 때문에 포병이나 기갑 분야에도 배치되지 않는다고 하니, 군대 내에서조차 철저하게 ‘직무의 성별화’, ‘성별의 분업화’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나는 직무의 성별화가 가정과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군대 내에서조차 성별의 분업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비로소 진짜 남자가 된다.’는 등의 언설을 보더라도 군 입대 자체가 ‘남성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진다면, 군대 내에 있는 여성의 존재가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차별을 받을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듯이, 전방에서 근무한 이력을 과시하며 후방이나 공익근무로 근무한 남성을 은연중에 경멸하는 태도는 전방의 위험지역에 복무한 이력이 ‘더 강한 남성성’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후방에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성이 남성과 같은 참호에 있는 건,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터이다. 차라리 간호군에 안치(?)하여 자신들의 ‘어머니’의 역할에 묶어두는 것이 그들에게는 ‘여성에 의한 위협’ 이 없는 안전한 모양새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군 입대 의무를 주장한다면 그에 대해 반대할 생각은 없다. 의무의 동등한 수행에 대한 주장이, 처음부터 의무에서 배제시킨 여성에 대한 이중 차별을 주장하는 쪽보다는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더러 나오고 있는 ‘군 가산점 부활’에 대한 주장이 그것이다. 그 처연하고도 웃지 못하는 ‘분노의 전가’는 남성들이 내뱉는 불합리의 전형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인 하나인 ‘국방의 의무’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로 명시되어 있다. 여성의 입장으로 보기엔 당연히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이다. 이 땅에서 국방의 의무를 지는 건 남성만인데 그럼 법이 지정한 ‘모든 국민’ 은 남성만을 뜻한다는 말인가. 2등 시민 취급을 받는 여성과 장애인은 병역의 의무에서 ‘면제’된 것이 아닌 ‘배제’된 것이라는 정희진 작가의 주장은 그래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군입대를 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분노는 ‘군대를 가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남성들이, 엄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는, 분노의 전가라고 볼 수 있다. 편법으로 군 면제를 받은 특권계층의 남성들을 향한 분노를 여성과 장애인에게 치환, 전가하고 있는 그들은 정작 그 특권계층에게는 아무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작가의 예리하고도 날이 선 비난은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어 주는 데에 충분했다.
‘남성을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남성 지배 세력과 군대에 가야 하는 남성간의 갈등이, 군대를 가는 남성과 ’군대도 못 가는‘ 여성들 간의 갈등으로 이동한 것이다.’ ( 책 중에서 )
‘군 가산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책 중에서)
모병제를 추진하자거나, 국방의 의무를 지우는 기준을 동일하게 하자는 주장 대신, 현재 ‘의무’에서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취업권 박탈, 혹은 차별을 가하자는 주장이 과연 최소한의 논리나 합리를 품고 있는 주장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논제일 것이다. ‘여성에게도 동일한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라.’ 차라리 훨씬 더 합리적인 이 주장은 그러나 사회적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지탱하는 군사주의에서 여성이 포병 기갑 분야 등의, 완전히 동등한 의무의 테두리 안에 진입하게 되는 것을 남성들이 과연 진정으로 원하는지는 의문이다. 남동생과 군 입대 이슈를 놓고 논쟁을 벌였을 때 그 아이가 하던 말은 그래서 꽤나 인상적이었다.
“여자들이 군입대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평등을 외칠지 무섭다, 얼마나 더 많은 걸 요구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동등한 의무를 수행한 존재가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데 그게 끔찍하다니, 그 아이는 본의 아니게 ‘남성주의’의 진심을 털어놓은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