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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하는 여자들

정이현의 '낭만적 사회와 사랑'

by 이라IRA

토리 텔퍼의 책 ‘여성 연쇄살인범의 초상’에서 흥미로웠던 점이 한 가지 있다. 여성범죄 역사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열 명 넘게 독살한 무시무시한 살인범들을 제쳐 놓고 가장 적은 수의 피해자를 배출(?)했던 리지 할리데이라는 살인범을 ‘지구상 최악의 여자’라는 평을 내렸다는 점이다. 다소 의아했던 이 간극에는 ‘살인을 행하는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다.

리지 할리데이는 타겟으로 삼은 몇 명의 희생자를 가위로 찌르고, 총으로 쏘는 등의 ‘물리적인 힘’으로 희생자들을 제압하고 죽였다. 그녀의 몸은 여타의 여성들과는 다르게 꽤 근육질이었던 듯하다. ‘남성이 행하는 방식과 비슷했던, 남성적인 살인’, 세상이 그녀를 최악의 살인범이자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이유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조차 자신의 아들이 아내에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무서워서’ 도망가지 못했다고 하니, 그녀는 '근육 우먼'이었던 게 분명하다.

반면 눈 하나 깜짝 않고 독살을 남용했던 여타 사이코 패스들에 대한 별칭이 ‘얼음 왕비 안나 한’ 등의 귀여운(?) 어휘로 표현했던 걸 보면, 사람이 죽은 건 매한가지인데, 유독 리지 할리데이를 무서워 하는 건 재미있는 현상이다. 파헤쳐 보면 더 잔혹하고 끔찍한 독살이라는 방식이 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방식’의 살인으로 와 닿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독살을 이용했던 여성들은 주로 그들이 가진 외모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최대한 이용하여 희생자에게 접근했다. 메리 앤 코튼과 안나 한은 결혼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려 했고 또 다른 남편으로 갈아탐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더 개선시키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의 규율 안에 있는 가부장제에 완벽하게 편입한 듯 보였고, 훈련(?)해온 여성성을 유감없이 어필했다. 그러나 그것이 위장술이었다는 사실을 남성과 그들이 속한 사회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위 조절을 하지 못했던 마구잡이 살인행각으로 인해 살인범들의 본심이 결국 드러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존재로 각인되었다.


반면에 또 다른 유형의 여성들이 존재한다. 살인이 발각되어 어쨌든 ‘악녀’로 찍힌 여성과는 다른, 위장술을 통해 끝까지 살아남는 부류,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이들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연기하면서 ‘로맨스와 결혼’이라는 판타지로 포장된 체제의 질서에 순응하는 척, 이 세계를 교묘하게 교란시키는 뛰어난(?)재능을 지닌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세간으로부터 낙인찍힌 살인범들과 다른 점은 속된 말로, ‘더 여우같은 존재’ 들이라는 점이다. 이 여우들은 체제 속에 순응하는 척 ‘내숭’을 떨며, 때로는 교활하고 비열한 방식을 동원하여 자신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실현시키며 살아 나가는 존재들이다. 설령 끔찍한 남편에 대한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들키지 않는 영민함(?)과 치밀함 또한 지녔다는 점에서 마구잡이식 살인범들과는 다르다. 비록 여기서 언급하는 인물들이 작가 정이현이 만들어낸 픽션 속의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이들은 사실, 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여성들 이라는 점에서 소름 돋게 현실적이다. 정이현은 이들을 지극히 냉소적이다 못해 약간은 희극적인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이들은 공적 혹은 사적인 세계가 정해 놓은 가부장제 규율과 체제 안에서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내지만 그 큰 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 생존 전략을 세우는 이들이다.

위선적인 교수 부친을 가진 부유한 소녀가 내심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하면서도 그의 원조교제는 고발하지 않고 덮어주는 관대함(?)이랄까, 그 대신 자신의 ‘소녀성’과 아버지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부모를 등쳐먹는 장면에서는 폭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강북스타일 오빠’에게 오토바이를 선물하기 위해 벌이는 인신매매 납치극은 어떤 희극보다도 더 재미있는 대목이었다.

더 높은 세속적 지위를 위해 사내의 상사나 오너에게 자신의 성을 은근히(?) 혹은 거리낌 없이 이용하는 여성들 또한 이 사회 속에서는 분명히 존재한다. 단편 중 ‘트렁크’는 그런 여성상의 단면을 3인칭 시점을 통해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성을 바치지 않더라도, 내숭과 가장된 여성성, 즉 위장술로 현실적인 생존전략을 짜는 존재들도 있다.

경험상 남성 상사는 실력으로 치고 올라오는 여성 부하직원보다 욕심을 감춘 채 언제까지고 자신의 그늘 아래 있으려는 (혹은 그러는 척 하려는) 여성 직원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점을 절감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도 비슷하겠으나, 부하직원이 여성일 때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어차피 유리천장 때문에 올라가지도 힘들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는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디자인계였는데 부서별 본부장은 90%가 남성이었고 그 중 여성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디자인 부서의 디렉터조차 남성이었다.)

‘홈드라마’ 라는 단편은 평범한 남 여 한 쌍의 ‘결혼 준비’라는, 한없이 지루하고 정형화된 스토리를, 있는 그대로 지루하게 전개하여 그런 방식이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코믹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도록 하는 역설을 만들어 내었다. 결혼이라는 낭만으로 포장된 허울 뒤에 숨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못해 째째하고 자질구레한 온갖 절차들, 예비 부부의 양가에서 내심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적 계산기 등은 세속적이고 비루한 결혼의 민낯을 진절머리 나게 보여주는 데에 충분했다.


책 뒷부분에 후기처럼 실려진 이광호 평론가의 글에서는 스토리 속의 현실주의자들 또한 제 나름의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라고 규정지었지만 나는 이들이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 외에는 관심이 없는 ‘가부장제의 조력자’라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면이 전혀 없었는지 자문해 본다면,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한다.

‘남성중심주의의 현실을 돌파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한 이들의 방식 또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고 얘기하는 평론가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세계의 규율적인 메커니즘 안에서는, 저항 역시 그 권력관계의 일부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평론가는 이들이 체제가 요구하는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자발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가 저항일지라도 그것은 고립되고 개인화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저항의 대상 또한 불분명하기 때문에 비록 체제에 균열을 내는 그들일지라도, 그들은 ‘순응’과 ‘저항’ 사이에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들이라 지적하는 지점에서 그 예리함과 찬란한(?) 지성에 연신 감탄했던 터였다.

그래서 나 또한 이 사회의 일부의 존재로서 긴 머리를 찰랑거리도록 유지하고, 멀리 나갈 때는 공들여 메이크업을 하며 외모에 대한 단점을 끊임없이 신경 쓰나 보다. 설마 나는 정이현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존재인 걸까. 아니, 어쨌든 나는 비혼주의자이니, 나 또한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가장자리 경계선의 어디쯤에, 애매하게 혼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체제 안에서 생존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체제 밖에서,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부터 완전한 탈피를 지향하는 그들, 체제가 규정하는 모든 여성성을 거부하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노메이크업을 고수하는 용기 있는 선택과 4B를 지향하는 일관되고 담대한 그들을 다시 한번 응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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