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여성들은 왜 페미니즘에 맞섰는가.
2004년 성매매 방지 특별법 시행 이후로 밤의 거리를 흉물스럽게 물들였던 도시 속 집장촌들이 사라졌다.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이 법의 실행을 성공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경찰청 여성청소년계 이금형 과장은 당시 여성운동계의 영웅 같은 인물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당시의 노무현 정부와 경찰계의 성공적인 합작품이었던, 집장촌 철거에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에 나 앉게 된 성 판매 여성들은 정부와 경찰, 여성부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시위현장에서 이와 같이 외쳤다.
“여성부는 자폭하라!”
‘이런, 제정신인가?’ 그들을 두고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대안도 없이 당장 길거리로 나 앉아야 했던 여성들의 분노이자 절박한 외침이었다.
성매매 업종의 여성들 중에는 2002년 군산의 기지촌에 감금된 채 화재로 목숨을 잃는 등의,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와는 다르게 필요에 의해서, 즉,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이들도 분명 있었다. 성 매매가 ‘선택’이냐 혹은 ‘강요’인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성을 사고 누리는 주체가 항상 남성이라는 전제를 간과, 혹은 묵과하고 있으나, 어찌 됐든 ‘선택’에 의해 성매매업에 뛰어들었던 여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주겠다는 여성부를 향해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냈다는 점은 놀랍고도 주목할 만 한 일이다.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모든 여성의 생각은 같을 것이다.’라는 명제가 다른 여성 집단에게 또 다른 억압의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건 나 또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던 오류였다.
‘그래서, 그 이후로 성매매는 근절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집결지’의 형태를 띠던 성매매 업소는 출장 성매매, ‘마사지를 가장한 성매매’, ‘온라인을 통한 즉석 만남 성매매’ 등 형태만 바꾸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오히려 생활 속 더 깊숙하게 파고든 성매매는 더 은밀하고 넓게 퍼져 정확히 추산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집결지를 오가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성을 구매하고자 했던 가난한 남성노동자 층이 성을 사는데 약간의 어려움과 귀찮음(?)에 처했을 뿐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의 정희진 작가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성매매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하면서도 ‘왜 성 판매자는 늘 여성이고 성을 사는 수요자는 늘 남성일까?’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 말이다.
이 복잡스러운 사회에서 어렵게 보이기만 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러나 비교적 심플하다. 여성의 성이 ’교환상품‘처럼 거래되는 일, 자신의 배속으로 낳은 자식에게 남편의 성을 물려줘야 하는 일, 그래서 역시 여성을 교환가치처럼 거래하는 모양새를 갖춘 결혼제도, 자신의 조상은 제쳐두고 남편의 조상부터 모셔야 하는 관습과 통념은 모두, 여성이라는 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서 그렇다. 여기서 남성의 ’성욕‘이라는 개념은 아무 상관이 없다. 성매매의 수요자와 공급자는 역시, 철저히 성별 권력관계가 만들어낸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남성중심주의에서 비롯된 섹슈얼리티가 존재하는 한 성을 사는 남성과 성을 파는 여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쉬운 말로 ‘눈총’을 받고 이목이 집중되는 성 판매 여성들과는 다르게 수요자인 남성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숨길 수 있다. 사회는 성을 팔지 않는 ‘정상적인 여성’과 ‘성매매 여성’을 명확히 구분 짓고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성매매 여성들을 사회 구성원은커녕 ‘인격체’로도 취급하지 않는 이중 잣대를 너무 쉽게 들이 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을 파는 여성들, 그들이 이중적인 기준과 차별, 멸시를 견디면서 계속 그 일을 하는 것은 사회적인 시선과 비난보다 눈앞에 닥친 생계가 더 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매매를 해왔던 여성이 그 세계를 떠나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마치 쳇바퀴 안에서 매일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치게 가기 싫은 회사로 출근해야 했던 예전의 나와 그들은 어떻게 본다면 이런 면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미국의 필리스 루먼 메탈이라는 여성이 했던 얘기는 충격적이긴 했으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관점을 뒤집어주는 신선한 발언이기도 했다.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 매춘부라는 직업을 택했을 때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 사람의 아내였을 때 나는 불쾌한 일을 해야 했고, 내 욕구가 아닌 남편의 욕구를 총족시켜야 했다.... (매춘 일을 했을 땐) 내 남편처럼 나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손님은 없었다...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식을 버려야 하는 손님도 없었다. 손님 가족이 내 삶을 비참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매일 밤, 술에 취해 오는 손님도 없었다.’
(모든 기혼 여성이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지만) 공권력이 좀처럼 개입하기 싫어하는, 완전한 사적 영역인 가정은, 집안의 대장, 즉 가장이 폭군으로 변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된다는 언급은 지난 번 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가정은, 무법지대가 되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다. 현재 불행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무수한 기혼 여성들이 성매매 업소의 여성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희진 작가는 성매매 여성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일은, 이 사회가 들이대는 ‘성의 이중적 잣대’를 어쩌면 그대로 따라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고 있다. ‘정상적 범주 안에 있는 여자들’과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지어 놓은 그 정상이 정말 정상적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성을 교환상품으로 인식하는 성매매는 근절되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타자화와 그들에 대한 부정적이고도 획일적인 시선을 같은 여성인 나조차 고수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화려한 디즈니랜드 근처, 어느 그늘진 모텔촌에서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성매매를 시작하는 핼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처음엔 오히려 자신이 일했던 스트립 바에서 업소 사장이 요구하는 성매매를 거절하고 오로지 ‘쇼’만을 하겠다는 고집을 피워 해고당하게 된다. 생계가 막막해져 결국 스스로 성매매 일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핼리에게 미국사회는 ‘딸을 키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딸 (너무 귀여운 주인공) 무니를 강제로 빼앗아 보호 시설로 데려가는 결말로 이어진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강한 무력감 같은 걸 느꼈는데, 핼리는 그녀의 직업적 사회가 요구하는 성을 제공하지 않았더니 해고되었고 성을 제공했더니 딸을 빼앗겼다. (어쩌란 말인가?) 성 매매하는 엄마 밑에서 크는 아이를 정부의 보호 하에 귀속시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겠으나 핼리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그녀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스러운 딸 무니를 두 손 놓고 잃어버리게 되는 장면을 건조한 시선으로만 볼 수는 없게 된다.
로맹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라는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매춘부들이 몰래 낳은 자식들을 역시 몰래 키워주는 ‘로자’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 정 많고 따뜻한 인물을 모모라는 어린 아이의 해 맑고 티 없는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어떤 비참함을 담고 있는지 표면적으로는 잘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로자의 성품 인격, 그리고 장난기 많은 순수한 모모의 모습과 대비되는 그녀의 가엾고 비참한 인생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자식을 빼앗기기 싫은 매춘부들을 도우려는 로자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정말로 터부시해야 하는 존재가 과연 누구이고, 어떤 것일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페미니스트와 성매매 여성들과의 갈등을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타자성을 활용해 생계를 유지하는 성매매 여성들, 작가 정희진은 그들에 대한 획일적인 시선을 의심도 하지 않고 따라가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와 기회를 주었다. 성을 파는 여성들은 남성중심주의 사회와 가부장제의 철저한 조력자인가, 아니면 작가의 글처럼 ‘그들 역시 우리처럼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유목적 주체’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