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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Feb 28. 2022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1년 전에 전 회사 대표부터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다. 암 때문에 퇴사한 지 10개월 만이었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 부작용으로 왔던 부종을 줄이기 위한 또 다른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며칠간 부모님 댁에 머물면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마치 신생아처럼, 천장에 모빌이라도 달려 있는 마냥 누워 허공만 바라보다가 심심해지면 책 몇 줄 읽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그것도 지루해지면 잠이 드는 일상, 이 짓을 몇 주간 반복해야 했다.

 전 회사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던 순간에는 핸드폰으로 주식 차트를 요리조리 돌려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별안간 화면에 나타났던 그 분. (영화 ‘링’인줄..) 정말로 화들짝 놀랐다. 난 뭘 훔치다가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허둥댔다. 곧 모든 동작을 일시 정지한 상태로 나는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이 두 번 울리지는 않았다. 이후 카톡이 올지 몰라 긴장모드를 놓지 않았지만 그 영감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기뻤다. 약간은 미안했고 그보다 더 조금 그분에게 고맙기도 했다. 짧은 순간 복합적인 많은 감정이 스쳐갔다. 그 인간이 직접 전화를 했다는 건 회사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건강 상태 같은 안부나 물으려 전화할 성격은 아니신, 한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니까..(응?)

 나는 엉망인 내 상태를 그분뿐만 아니라 전 회사의 어떤 사람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 두 번 전화가 오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그 영감에게, 또 그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 아주 잠깐 기쁜 마음도 들었다. 빙구같지만 그랬다. 뒤이어 나에게 전화를 씹힌 영감님에게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어쨌든 나를 잊지 않아 줬다는 점에 대해 아주조금은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확고한 게 뭔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회사생활은 다시 하고 싶지가 않다는 그것. 완치되어 멀쩡한 인간이 되었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 없었을 거라는 생각. 15년 정도 겪어 왔던 회사인의 인생은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길고 길기만 한 터널 같았다. 지난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터널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되돌아가기 위해 역주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 나는 한마디로 반 패닉 상태였다. 회사인들이 흔히 얘기하는 번아웃 증후군이란 놈에게는 이미 뼛속까지 탈탈 털린 상태였고 우울증이 온 지도 이미 꽤 오래된 상태였다. 그래도 나는 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와 나의 팀 실적은 계속 좋게 나왔다. 아마 내 안에 덜 타고 남은, 자신도 모르는 뼛조각이 몇 쪼가리 남아있었나 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터널을 단숨에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 건 암이었다. 예고도 없이 어찌나 시원스럽게 찾아와 주던지. 진단을 받았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고 공포스러웠던 그 순간의 감정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며칠 전에 그 회사의 또 다른 이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태가 호전되었다거나 남에게 자랑할 만한 뭔가를 그럴듯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 찌질한 나의 상태를 누가 알든 말든 상관없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받고 아무렇지 않게 안부인사도 나눴다. 이사님은 다시 예전처럼 같이 일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도 아니고 아주 호기스럽게 제안해 왔다. 나는 바로 이사님에게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다 오픈했다. 아니, 조금 더 과장하여 얘기했다. ‘저 장애인이 됐어요.’  이사님은 얘기를 듣더니 서둘러 마무리 발언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언젠가 밥 한번 먹자는 뻔한 얘기를 남기고서는. 그 분은 입이 싸기로 유명하다. 지금쯤 전 회사 사람들에게 내 소문이 다 퍼져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이젠 다시 전화는 안하겠지. 통화를 끝내고서 1년 전에 느꼈던 그 복합적인 감정들이 데자뷰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는 쭉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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