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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Oct 05. 2020

그래도 계속 갈 것(carry on)

부엔 까미노!


왜 하필 성주호 둘레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연휴 5일 중 4일을 하고 싶은 것 맘껏 하지 못한

자연주의 우리 부부에게는 후보지가 몇군데 있었다.


1. 억새밭 산행 (정선 민둥산 or 광주 무등산)

2. 백두대간 협곡 트레킹 (V-train타고 낙동강 세평 하늘길)

3. 지리산 둘레길 (벌써 3번째 같이 걷는)


나는 가을을 흠뻑 맞이하고 싶었고, 꽃과 나무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억새를 마음껏 보길 원했고, 이왕이면 그가 운전을 안 했으면 했다. 그런데 후보지들을 모두 제쳐두고 뜬금없이 그가 새로 서칭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전날 저녁의 피치맥파티, 아침의 소고기버섯비빔밥.


일요일 오전 6시,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고.

"분천역은 굿바이~~~~~" 라며 놀리는 그의 목소리가 일층 거실에서 들려왔다. 백두대간 협곡 트레킹을 하려면 V-train을 타는데, 분천역가는 열차가 하루에 단 두 번, 6시에 있기 때문이다.

눈도 덜 뜬 채 침실에서 나와 복층계단을 절뚝절뚝 내려오는 나에게 대신 자기가 괜찮은 새로운 곳을 찾아냈다고 자랑한다. "아 왜 또 새로운 곳이야 새로운 곳은..."

그만 좀 후보지 늘리지 하는 생각에

핍박주는 내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알려주는 곳은 다름 아닌 성주에 있는

가야산 선비산수길.

전체 두 코스가 있는데 그중 우리는 독용산성을 오르고 성주호를 한 바퀴 도는 1코스 성주호 둘레길(23.9km)을 걸을 거라고. 호수 둘레길이야 좋은 거 말해 뭐하고, 무엇보다 성주는 대구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가니 부담이 없다. 그래서 오케이하고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둘레길 여정에 아침 든든하게 먹어야지, 그가 호다닥 소고기 버섯비빔밥을 해줬다. 반숙계란후라이도 올려서. 든든하게 먹고 그가 내 작업실에 가서 차박용품들(캠핑의자, 버너와 코펠)을 챙기는 동안 난 1분 거리 친정으로 갔다. 이번 명절 동안 아빠 엄마를 장례식장에서 말곤 한자리에서 본 적이 없어서. 두 분께 아직 명절용돈을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침을 드시는 아빠와 막 씻고 나온 엄마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작지만 저희 마음이에요." 하고서.


이래저래 준비하고 챙기다 보니 벌써 8시가 넘었다. 성주로 얼른 무브 무브. 출발하는데 하늘에 햇빛 한 줌 없이 흐리디 흐리다. 그간 그렇게나 날씨 좋더니 막상 우리 트레킹 하는 오늘 이러기 있냐며. 컨디션도 양호하지 못했던 나는 농담 반 진심 반으로 기분이 안 난다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캠핑이나 하고 쉬자 그랬지만 그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ㅋㅋㅋ


흐려도 너무 흐려ㄸㅏ...쓰잉


흐린 성주 금수문화공원에 도착해서 몸을 풀고 독용산성으로 올랐다. 초입에 '독용산성 2.5km' 진하게 표시된, 새것 같은 팻말이 무색하게 등산로는 처참했다. 레깅스 안으로 다리를 찔러대는 거친 풀이 무성했고, 무척 습한 탓에 날벌레들이 얼굴을 괴롭혔고(눈으로도 날아 들어왔다 이노므벌레스키) 무엇보다 양갈래 길에서 어느 쪽 방향인지 표시를 해두지 않아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하게 했다. 그동안 많은 산과 둘레길을 가보았지만, 심지어 DMZ 일원의 한탄강에서 키보다 높게 자라난 풀숲을 해치며 트레킹 한 적도 있음에도. 걸었던 모든 길들을 다 합쳐도 이 길이 가장 형편없었다. 점점 누군지 모를 둘레길의 담당부서와 담당자에게 화가 났고. 독용산성의 모습은 너무나 궁금하지만 이대로 더 이상은 진행이 어렵겠다 싶어 우린 등산로 초입에서 돌아 내려왔다.


이렇게 크게 적어놨음서 길은 왜 그따구예요...?


그간 여행이나 산행에서 힘든 일들 많았지만 그때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고 웃음으로 승화하는 편인데 성주호 둘레길은... 도저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이날의 여정에서 마주한 것들에 몇 번이나 '성주군청 홈페이지에 컴플레인  올려야겠다.' 생각했던.


아직 데크길이 미완이라 위험한 도로로 걸어야하는 것도 그중 하나.


내려와 다시 원점인 광암교(금수문화공원)으로 돌아왔고. 본격적으로 호수 둘레길 걷기를 시작했다. 독용산성 등산로는 성주호 둘레길에 몰빵하느라 신경을 못쓴 건가 싶을 정도로 길은 나무데크길이 아주 평탄하고 탄탄하게 잘 조성되어 있었다. 나중에 길을 걷다 보니 '성주호 둘레길 완공 기념' 하면서 데크 기둥에 리본이 메여있었는데, 2019년 3월이었다. 이렇게 불과 작년에 생긴 둘레길이구나... 근데 왜 독용산성 길은 정돈 안 해놓은건가요(뒷끝 작렬)


이거지. 길은 이래야 한다며.
산대장, 오늘은 나만의 대장ღ


흙길과 데크길이 섞여있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길 옆 나무 사이로 보이는 호수 색깔이 흐려서 선명하지 않기에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던 둘레길. 사람은 없었는데 또 아주 없진 않았다. 7시간 동안 서너 팀의 사람들을 마주했는데, 우리만 트레킹 여행자 행색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동네 마실 온 차림이었다. 쉬어가려고, 또 간식을 먹으려고 노리던 몇 번의 정자를 지나치고 부교를 만났다. 비올 땐 물이 차올라 통제하는 호수 위의 나무 부교. 둘레길 끝까지 물 위로 걷고 싶은데 아쉬울 만큼 짧았다. 3킬로 좀 덜 걸었을 때, 문화재인 영모재에 도착했다.


부교 입구.
오늘의 제일 좋았던 지점, 부교길.



아직 반도 안걸었지만 화장실도 있고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함이 있고, 계곡물도 흐르는 이곳만큼 점심을 먹기에 좋은 장소는 없을 거라 판단해서 먹고 가기로. 커플인지 부부인지 불륜인지 아무튼 한쌍의 남녀가 옆 벤치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고, 차 한대를 사이에 두고 우리도 자리를 잡았다. 무거워서 차에 빼놓고 온 캠핑의자가 잠시 생각났지만 벤치에 마주 앉으니 충분했다. 오는 길에 산 부대전골과 햇반을 데우는 동안 가야산막걸리 한 잔씩을 먼저 짠 했다. 적당한 탄산과 산미가 단맛이랑 어우러져 맛있었다. 좀 더 걸은 뒤 힘든 타이밍에 마시면 더욱 꿀맛일 아이. 다 먹었으니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 봅시다.



문이 굳게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했던 영모재.
신행 때부터 함께한 마테호른 잔에 가야산막걸리.
벤치에 흘린 물과 양념은 떠나기 전에 깨끗하게 닦고 일어나기.



공복 막걸리의 취기를 살짝 느끼며 영모재를 지나 내 이름과 같은 아라월드를 만났다. 수상 레저기구 타러 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둘레길 걸으러 와서야 만나네. 계절이 계절인지라 레저기구는 운영을 안 하고 있었고 간간이 수상스키 타는 것만 시원하게 성주호를 질러 지나갔다. 성주댐에 당도해서, 가로지르는 다리나 지름길 있으면 좋겠다만 야속하게도 마을 깊숙이 먼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게 해 놨다. 여기서 또 한 번 도보여행자에게 배려 없는 성주군에 약간스 푸념하고. 지쳐갈 때쯤 성주호전망대에 당도했다. 숲길에서 만났던 노년의 부부가 먼저 쉬고 계셨고, 언택트 여행을 위해 보통은 정자에 사람이 있으면 지나치던 우리였지만 이곳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추억의 카라멜땅콩과자 먹으며 다시 에너지 재충전.


안녕 아라야 나도 아라야.
영역 표시했으니 우리꺼(?)


원래 전체 길이 23.9km인 코스지만 독용산성 길을 다 안 걸었으니 오늘의 총거리는 약 15여 킬로. 10킬로, 2만 보를 넘어가니 많이 지침을 느꼈다. 습도 높고 저기압인 날씨도 한 몫하고, 또 배란기 증상인 변비와 아랫배통증을 겪는 내 컨디션도 한 몫했고, 도통 보상을 해주지 않는 성주호의 지루한 뷰도 한 몫해서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3분의 2 지점을 지나 성호정~신성리 마을쯤엔 한층 더 가을색을 입은 나무와, 조금은 맑아진 하늘, 그리고 뒤로 보이는 가야산의 위상으로 좀 더 힘을 내보았다.


가야산바라기 그.



지쳐하는 나에게 그는

"부엔 까미노!" 하고 싱긋 웃어 보였다.

나, "아~ 산티아고순례길 위한 트레이닝하는거야?"

그, "그렇지."

나, "근데 이젠 너 정년퇴직하고 난 후에야 갈 수 있는 거 아냐?"

그, "응. 맞아."

나, "그럼 앞으로 30년은 더 트레이닝해야겠네."


그 언젠가 선교자의 길 800km 40일간의 여정을 걷는 그날까지 존버한다.



성주호
가을가을해1
가을가을해2
가을가을해3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가야산 선비산수길을 다 걷고, 마침내 원점 금수문화공원으로 회귀하였다. 체감은 3만 보 넘은 거 같았는데 2만 5천보 가량.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4시간 30분 동안 등반고도는 366m, 총 15.3km 거리를 걸었다고 애플워치가 알려왔다.



정말 고생많았다 우리!


얼마 전 아빠가 사 오셔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김치곱창전골을 저녁으로 먹고 가려했는데, 왜 이렇게 검색이 안되지. 알고보니 성주 아닌 상주(1시간 여 거리). 점 하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좌절 흙흙. 성주에 맛집을 검색해보아도 마땅한 곳이 없다. 대부분 돌아가는 길과 동 떨어진 가야산자락에 위치. 그래서 대구 가서 먹기로 하고 맛있었던 가야산막걸리만 아빠 것까지 몇통 사서 이제 대구로 돌아갑시다.


살면서 몇 번 와본 적 없지만 대구 근교의 고령이나 합천처럼 심리적 거리가 가까웠던 성주. 아는 것은 참외뿐이던 성주. 7시간 여 머물렀고, 성주호 둘레길 트레킹으로 한층 더 진하게 알고 돌아간다.


대구 돌아가는 길, 가야산바라기씨는 끝까지 뒤를 돌아봤다.
산 콜렉션에 홀딱 반해 마트에서 그가 집어든 연양갱선물세트ㅋㅋㅋ 집에와서 열어보니 어떻게 설악산과 한라산이 없을 수 있냐며.



다음 주는 생일 주간 휴가, 그와 함께한 추억의 내일로를 백두대간 협곡 트레킹을 목표삼아 다시 한번 가기로 했다. 우리의 분천역과 태백으로 :•)

많이 지치고 힘들지언정, 멈추지 말고 그래도 계속 갈 것! keep calm and carry on


그리고

Buen camino!
'좋은 여행이 되길,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하길'



작두콩이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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