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마저 아름다운 나에게
그림자를 좋아했다. 좋아하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길에 비친 내 그림자를 바라보았고 자주 사진을 찍어 두고는 했다. 길을 가다 그림자를 보게 되면 가던 길을 멈추고 조금 되감기하여 가던 길을 돌아가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를 찾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있는 나 자신도 좋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리게 되는 그림의 소재들 중에 "나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림에 담는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 비치는 그 까만 그림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다. 나는 그림자라는 말 대신 그늘이라는 단어로 그림에 담긴 메세지를 적어 놓기도 했다.
사진에 찍히는 나의 그림자는 늘 어두웠지만 내가 그리는 나의 그림자는 검정의 단색만은 아니였다.. 그림자가 갖고 있는 그 어둠에 꽃을 달아 주었고 오히려 더 환하고 밝게 빛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림으로는 내 마음대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그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유를 나는 또 다시 만끽하며 나만의 예쁜 그림자를 그렸다.
어두운 그림자를 나의 그늘이라고, 그 그늘은 밝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림에 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내면 깊숙한 곳에 내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나"를 그림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그림자는 나와 늘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아니, 그 보다는 더 진한 그냥 나 자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내면에 그늘과 그림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서 사회화 과정을 거쳐 밝고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각자만의 그늘을 품고 살아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불쑥 튀어 나와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내가 의지하고 더 없이 편하다 생각되는 믿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림자의 일부가 표출 되기도 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근본적인 이유나 실체를 알 수 없어 답답해 하기도 했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라는 작가가 쓴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을 알게 된 것은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 책에서 그림자에 대한 짧은 글을 통해서였다.
주인공 슐레밀은 우연히 어떤 파티에 참석해 신비한 인물을 만나 이상한 제안을 받는다. 그림자를 팔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주인공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행운의 자루'를 받는다.
그림자라는,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무언가를 파는 대신, 엄청난 부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곧 그림자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경원시한 것이다. 그때 악마가 다시 나타나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림자를 다시 돌려줄테니 죽은 뒤의 영혼을 자기에게 팔라는 것이다. 갈등 끝에 주인공은 이 제안을 거절한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저
어릴 때는 그저 길 위에 비친 까만 실루엣, 그림자 자체를 이유없이 좋아했지만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게 되면서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 그림자 자체만이 아닌, 내가 갖고 있는 그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림자에 유독 오랫동안 눈이 머무르곤 했다. 김영하 작가님의 책을 통해 알게 된 "그림자를 판 사나이"책을 찾아 읽으며 그가 말하고 싶었던 그림자는 어떤 의미일지, 내가 어렴풋이 인지하는 그것과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림자란 무엇일까?
평소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살던 존재, 그림자. 하지만 그림자를 팔아 버리자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했다. 진사회성 동물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그림자였던 것을 그림자를 팔아 버린, 그림자가 없는 존재가 되자 깨닫게 된것이다.
나의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그림자
그늘마저 아름다운 나의 존재
그림자와 대면하는 용기, 그림자와 대화하는 공감 능력을 키운다면 무의식의 그림자는 오히려 우리의 의식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선물해주는 축복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는 매일 내 그림자와 대면하는 글쓰기를 통해 조금씩 강인하고 유연해지는 나 자신을 실험하고 싶다. 신기하게도 그림자를 탐구할수록, 자신의 고통과 자신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탐구할수록 진정한 나 자신에게 더 다가가게 된다.
- 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p.170), 정여울 저
그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나 대신 말해주고 있는듯한 정여울 작가님의 책들을 만났다. 그림자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존재임을 받아 들였다. 아직 그 실체를 만나기 위한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그 어떤 트라우마의 기억을 대면 하게 될까봐 아직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본 나의 그늘은 다채로운 색을 갖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이나 내가 느끼고 싶은 감정이 아닌데, 이유 없이 나에게 불쑥 찾아올 때면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는 했다. 그것의 원인이 나의 그림자로부터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 실체를 발견하는 것은 더 심오해져버린 느낌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없이 단순해지고 평온해졌다.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을 통해서 내 안의 그림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만나는 그림자는 희미하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대면하게 되는 내 안의 그림자는 보다 진하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그 대면으로부터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애써 거리를 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것을 이겨내어 보다 깊게 들어가 그림자와 마주 했을때 마음이 충만한 밝은 에너지로 가득차고 있음을 느낀다.
지독하게 사회화 되어 버린 자아의 페르소나. 모든 역할과 가면을 벗어 버리고 만난 자유롭고 단단한 영혼의 그림자. 이 힘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그렇게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