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청예 Jun 12. 2021

글쓰기의 신

세상에 문신(文神)이 나타났다.



문신(文神)이 강림했도다. 세상 모든 글을 다스리는 글쓰기의 신이자 이야기의 씨앗이다. 인류 탄생 이후 문신은 단 두 번밖에 강림하지 않았다. 처음엔 인류에게 말을 가르쳐주었으며 다음에는 활자를 가르쳤다. 그리곤 자취를 감추었다. 좀처럼 행색을 내보이지 않고 늘 숨어있는 모습마저도 가히 문신다웠다. 결국 인류는 문신을 기억에서 거의 다 지워버렸다. 아직까지도 믿음을 이어가는 자는 지상에 문하생 딱 넷 뿐이었다. 오늘 문신이 그들 앞에 나타났도다.


안타깝게도 문신이 가진 신력이 고갈돼 은총은 한 사람만 받을 수 있게 됐다. 문신의 은총을 받으면 그는 글쓰기 신이 임명한 후계자이자 제1의 후손이 된다. 현존하는 영장류 중 유일이다. 넷은 자신에게 문신의 은총이 떨어지길 간곡히 바랐다.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었다. 문신의 물음은 의외로 간결했다.


"너희가 글쓰기로 이루어야 하는 목표가 무엇이냐."


당위를 물었다. 참으로 쉽지만 난제였다. 넷은 천하제일 글쟁이가 되고 싶었으나 그 이유를 망각한지는 오래였다. 글쓰기에 너무 진심이 돼버려 본인이 무엇을 위해 펜을 잡았는지 잊고 살았다. 옆 사람보단 내게 더 명분이 있겠거니 싶었지만, 처지가 모두 같았다. 그러나 절대적 기회다. 누구도 이 기회를 허무히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본인이 글쓰기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토해냈다.


첫째가 대답했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함입니다."


문신이 구역질하는 시늉을 보이며 크게 불쾌해했다. 그는 이내 불호령 대신 번개를 내리치며 첫째를 꾸짖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돈으로 더럽혀지는 걸 최악으로 삼는 신이었다. 문신이 그의 머리를 탁 하고 쳤다. 첫째는 쏜살같이 글 쓰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윽고 문신이 떠나라! 외치자, 재빨리 도시로 떠나버렸다. 그 모습이 꼭 패배자가 도망치는 꼴과 같았다. 첫째는 아마도 글이 아닌 다른 걸 하며 돈을 벌고 살 거다. 아무튼 글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니 문신이 이를 가여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셋이 벌벌 떨었다. 하지만 용기를 낸 둘째가 호기롭게 답했다.


"명예를 얻기 위함입니다."


문신이 역시나 불쾌해하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가 이번엔 해일 같은 비를 퍼부어 둘째를 쫄딱 젖게 만들었다. 자신을 향한 애정이 기만으로 바뀌는 걸 몹시 싫어하는 신이었다. 글이 아닌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꼴을 보고 있지 못했다. 문신이 그의 옷을 마구 찢었다. 둘째는 쏜갈같이 글 쓰는 영감을 잃어버렸다. 이윽고 문신이 떠나라! 외치자, 재빨리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모습이 부끄러워하는 변태 꼴과 같았다. 둘째는 아마도 서둘러 행색을 갖추고 망신당한 척 없는 체하며 삶을 속일 거다. 역시나 글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다. 문신은 당연 가여워하지 않았다. 남은 둘이 벌벌 떨다 못해 눈물을 찔끔 흘렸다. 하지만 셋째가 큰 마음을 먹고 답했다.


"인기를 얻기 위함입니다."


문신이 크게 비웃으며 표정을 구겼다. 그가 이번엔 날카로운 모래바람을 만들어 셋째를 휘감았다. 자신을 향한 열망이 가벼워지는 걸 혐오하는 신이었다. 글을 가벼이 여겨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문신이 그의 눈에 모래먼지를 마구 넣었다. 셋째가 괴로워하며 글 쓰는 실력을 잃어버렸다. 이윽고 문신이 떠나라! 외치자, 재빨리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모습이 외로워하는 외톨이와 같았다. 셋째는 아마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 사람들 틈으로 숨어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글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다. 문신이 마지막 남은 넷째 문하생에게 너는 무엇을 위하여 쓰느냐 물었다. 넷째가 머뭇머뭇 거리며 조용히 답했다.


"그냥 글이 좋아서입니다."


이에 문신이 크게 기뻐하며 웃었다. 그가 번개와 비, 모래바람을 모두 거두고 태양빛을 다시 데려왔다. 글을 그저 사랑하는 문하생이야 말로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말했다. 허나 넷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기뻐하지 못했다. 그는 잃어버린 첫째, 둘째, 셋째를 가여워했다. 문신이 넷째를 위로했다. 이후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문신이 가진 글쓰기의 흥미와 영감, 실력이 모두 넷째에게 전수됐다.


"대신에 조건이 있다. 감내하겠느냐?"


넷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신이 이번에는 다른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넷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탄식했다. 문신은 넷째에게 재능에 상응하는 것을 주었다. 우울과 집착, 바스러지는 몸이었다. 넷째가 크게 슬퍼했으나 문신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동세기 동안은 다시 나타나지 않음직했다. 넷째는 이후 글을 포기하지 않고 평생 썼다. 그러나 몸이 가련히 바스러졌고 삼일에 하루씩은 우울해했다. 글쓰기의 신이 준 저주로 글을 놓지 못해, 범사를 살면서도 글에 매몰됐다. 넷째는 죽는 순간까지도 펜과 종이를 쥐고 있어 손목이 굳어버렸다고 한다. 허나 이상하게도, 글쓰기의 신이 준 재능으로 쓴 작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