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세계와 부조리한 인간"
한낮의 악마, 아케디아(2)
-조르조 데 키리코의 미술, "낯선 세계와 부조리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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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tlecture.com/article/909
늦은 오후의 햇살에 도시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햇살은 아케이드 건물의 파사드를 비추고, 슈트를 입은 사내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으며, 도시 광장에서 홀로 덩그러니 "자신만의 낯선 삶을 사는 고대 조각상"(박영란 역) 위로 스며든다.
멀리서 뭉게구름 같은 연기를 내뿜으며 기차가 달려오고 노란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러나 마치 얼음땡 놀이라도 하는 듯 모든 사물은 숨죽인 채 고요하다. 흡사 정지된 화면의 바로크 무대 세트를 이어받은 듯한 세계는 꿈처럼 기묘하고 초현실적이다. 조르조 데 키리코 회화의 도시정경이다.
20세기 초반 서양미술의 흐름은 프랑스의 다다, 독일의 표현주의,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 이탈리아의 미래파로 흘렀다. 여기서 미래파 운동의 반동으로 일어난 형이상학* 회화는 조르조 데 키리코를 위시하여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데 키리코는 인간의 합리적 사고만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세계의 원리와 구조, 인간의 내면세계를 예술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삶의 여러 가지 고통과 염세적 기분을 민감하게 그려냈다.
데 키리코의 회화는 기묘하고 시적이며 환상적이다. 특히 그가 포착한 현재의 인상은 시간의 경과와 지속이란 의미를 상실하고 참과 가상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그의 회화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미로와 아케이드, 기억과 꿈, 기하학적 도식, 원근법을 제거한 화면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세계를 표상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조리에 맞지 않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의 불을 지피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불굴의 이성으로도 이 '세계의 근본 원리'와 나아가 '부재하는 나의 실존'을 해명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좌표를 잃어버린 채 정처 없이 길을 헤맬 뿐이다. 그럴 때 내 안에 부조리**의 감수성이 태동한다.
이와 같은 부조리에 처한 개인의 정신적 위기와 실존적 고뇌를 이해하기 위해 데 키리코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들여다봤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유명한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표상의 세계'라고 규정하였다. 이 세계는 나의 지성에 의해서 인식되는 주관적인 세계이며 제한적인 세계이다. 표상 세계의 저편에는 '의지의 세계'가 있는데, 이 세계는 주관과 지성에 의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다.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특정한 법칙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지는 충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 이러한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자아는 자유의지가 소멸하고 실체로서의 의미성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지의 실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수동성을 더 강조한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가 출발한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자아’의 실재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불교의 ‘무아(無我)’과 상통하기도 한다(여림).
오직 의지만이 인과율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실체이고 인간과 세계는 의지의 객화 된 사물이며 인과율의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자유가 가상임을 간파한 자아는, 사악한 욕망을 마음로 내버려두게 된다. ‘게으름뱅이의 논리’가 고개를 든다. 게으름뱅이인 자아가 보기에 모든 행위는 필연이므로 책임질 필요도 없다(여림).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조리에 처하게 된 자아에게는 심지어 목숨조차도 무의미하다. 그는 자신을 망쳐나간다. 삶이 형이상학적 의미를 잃게 된다면 그 삶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은 것이다. 단지 더위와 짜증스러움도 자살을 하기에 충분하다(조중걸).
니체 또한 허무주의를 긍정한다. 니체가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말하길, “내가 자연 속에서 저 강력한 예술 충동을 감지하고, 그 충동에 깃든 가상을 향한 열망과 가상에 의한 구원에의 열망을 감지할수록 나는 점점 더 다음과 같은 형이상학적 가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근원일 자는 영원히 고통받는 자이자 모순에 가득 찬 존재이면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해 매혹적인 환상이나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 그런 가상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고 그것으로 성립되며, 그것을 우리는 진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해 경험적 실재로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자신의 경험적 존재를 세계 일반의 경험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근원 일자가 매 순간 만들어내는 표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역)
인간과 세계, 의식과 현실의 모순이 빚는 긴장은 영원한 고통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비극성을 긍정하는 대신 신이라고 하는 근원과 의지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반항적 인간'의 길을 제시한다. 부조리한 인간이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다시 데 키리코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그림 <몽파르나스 역(우울한 출발) 속 시계탑은 오후 1시 25분을 가리킨다. 바람 한 점 불지도 않는데 깃발은 펄럭이고, 가파르게 경사진 노란 비탈길을 두 사람이 오른다. 지금 막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역으로 돌진하고 있다. 그러나 기차도 기차에 오르려는 두 사람도 영원히 역까지 당도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림의 근경에는 덜 익은 바나나 다발이 놓여있다. 이 얼어붙은 공간 속에 덩그러니 놓인 바나나는 홀로 다른 시공간을 누비는 듯하다.
어쩌면 그림 속 쌩둥 맞게 놓인 바나나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에 탐닉한 데 키리코가 자기 자신을 인식한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 어떻게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이동시켜야 할지를 모르는 허무주의에 빠진 인간으로서. 여기 원인이 증발한 결과로써 부유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
상속받은 세계가 없어 어디에 나의 의식을 걸어야 할지 모르는.
* 형이상학은 영어 낱말 "메타피직스(Metaphysics)"는 그리스어의 메타(meta: 뒤)와 푸지카(fusika: 자연학)의 결합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을 통해, 우주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파악하려 하며, 사물의 배후에 있는 구조와 본질을 밝히고자 한다(구글 위키피디아).
**부조리는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원래는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적 의미만을 표시하는 말이었으나, 합리주의 철학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의미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1의 진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카뮈는 이 에세이를 통해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삶이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난 계속해서 '오직' 인간이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난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각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내 이성을 사용해 끊임없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나 영원에 대해 희망이나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구글 위키피디아).
[참고문헌]
박영란 역, 『20세기 미술의 발견: 조르조 데 키리코』, 예경, 1996.
백승영, 「형이상학적 일원론 모델로서의 ‘예술가-형이상학’」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지원 원 논문, 2017.
여림, 「존재와 허무의 공존 계와 회화의 ‘중성 형식’: <평범한 세계> 연작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박사학위 청구 논문, 2017.
조중걸, 『현대 예술: 형이상학적 해명』, 지혜정원, 2012.
한성경, 「조르지오 데 키리코 도시정경 연구: 아케이다와 멜랑콜리 개념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사학 석사학위 청구 논문」, 2005.
https://artlecture.com/article/988
글_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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