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작년 봄, 목련이 필 무렵에 써서 벚꽃이 하나 둘 잎씩 떨어질 때 완성된 글.
올해는 작년에 비해 꽃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 올해의 개화와 낙화는 작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의 황홀했던 봄을 기억하며 작년에 쓴 글을 올립니다. 올봄이 다 가버리기 전에.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 보니 벌써 목련이 피어났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올린 사진을 보아서 봄이 오고 있음을, 꽃들이 하나 둘 피고 있음을 진즉에 알았지만, 목련을 마주하는 그 순간의 감회는 남달랐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피어있는 노오란 개나리를 보며 “벌써 봄이구나.” 생각하며, 한없이 마음이 따스하고 들뜨는 기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목련을 마주하니, 개나리를 마주했을 때와 달리 애잔해진다. 아마도 벚꽃보다도 더 빨리 피고 지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져가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기 때문일 것이다. 벚꽃은 꽃이 질 때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황홀하게 진다. 그래서 벚꽃의 낙화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목련은 그 큰 잎이 하나하나씩, 때로는 한 송이가, 투욱투욱 땅으로 떨어진다. 그리고는 밟혀서 멍이 들고, 그러지 않게 가만두어도 하얀 꽃잎이 멍이 들어간다. 참으로 애잔하고 비극적인 낙화라고 생각한다. 하얗고 하얗게 고운 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 짧게 아름답고, 결국에는 그리 멍드는 모습을 바라보니, 나는 져가면서 멍들어가는 꽃들을 왠지 모르게 다른 꽃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꽃의 운명은 참으로 황홀하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탄생과 죽음의 순환과 같다. 그리고 그 순환은 나무의 생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를 통해 꽃은 비록 올해에는 지나, 다음 봄의 또 다른 탄생, 어쩌면 부활을 맞게 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환고리라고 생각한다. 피어나고 지는 것, 개화와 낙화. 이 아름다운 순환은 사실 우리의 삶과도 같다. 탄생과 죽음. 일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생에서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또 다른 탄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꽃들이 다음 해에도 필 것을 알기 때문에 쉬엄쉬엄 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봄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 만개하고 또 더 활짝 피어나다가 낙화하는 것처럼, 다른 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생을 활짝 피우다 그렇게 낙화하는 것이다.
꽃의 운명은 인생을 닮았다. 태어나서 죽는 것처럼 개화하고 낙화하는 것이. 그리고 그 모습은 갖기 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 다 같지 않는 것처럼. 태어나는 시기도 다르고, 만개하는 절정의 시기도, 낙화하는 방식도 다르듯이. 이전에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봄이 오면 무엇보다 벚꽃의 개화를 바라보며 그 꽃의 만개를 제일 고대하면서, 벚꽃의 낙화를 일부러 마중하러 다녔다. 개인적으로 벚꽃을 바라보며, 만개했을 때 보다 낙화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바람이 불면 흩날리는 벚꽃 잎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낙화하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꽃비를 맞는 것은 오로지 봄에만 할 수 있는 체험이었다. 그 어떤 비보다 아름답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봄이 오면 다른 봄놀이보다도 떨어지는 벚꽃들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나 목련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핀 모습은 하얗고 고귀해 보여서 좋았지만, 벚꽃이 만개하기도 전에 져버려 거리에 새겨지는 멍든 잎들이 더럽게만 느껴지곤 했었다. “예쁘게 피어나면 뭘 해. 끝이 이렇게 지저분한 걸.”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하얗기만 했던 그 큰 잎들이 발에 밝혀서 누렇게 멍이 들면 꼭 썩어버린 바나나 껍질 같기도 해서 눈살을 찌푸렸던 것 같다. 그러나 올해 목련을 마주하는데, 마음이 애잔했다. 떨어진 그 하얀 잎들을 목도할 때에는 마음이 애처롭고 애틋했다. 나는 아름답지 못한 낙화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은 사람들이 볼 때 젊은 나이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낙화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은 태어나서 완전히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의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화되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나도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나는 인생의 낙화에 대해서 생각한다. 끝이 좋은 인생, 말이야 좋지만 사실상 우리들 중에 그렇게 살다 갈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벚꽃처럼 화려하게 황홀히 낙화하는 삶을 살게 될 이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목련을 바라본다. 사실 목련과도 같은 낙화를 이루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꼭 비극적인 낙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죽음 닮게 맞이하고 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목련과도 같은 낙화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려한 끝은 아니겠지만, 자신을 묵묵하게 피워내고 고귀하게 스러져가다 조용히 떨어지는 그런 목련 같은 낙화. 세상의 모진 풍파에 멍이 들어 그 잎이 상했을지라도, 나는 그들이 얼마나 한 생을 묵묵히 조용하지만 애써서 살아왔는지를 안다. 목련을 낙화를 보며, 그 꽃이 하얗게 만개했던 그 시기를 상기하듯이 말이다.
꽃의 시기는 꽃의 낙화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개화하고 이르러 만개에 이르러 조용히 스러져가다 낙화한다. 그 모습이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각기 다른 시기에 아름답다. 매화는 가장 이르게 피는 꽃이니 만큼 그의 개화가 가장 고대될 것이며, 개나리도 그렇다. 노랗게 핀 개나리의 개화를 마주한 순간, “아아, 이제 모든 꽃들이 이어 아름답게 피어나겠구나.”하며 미리 봄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게 한다. 하얗고 하얀 목련 꽃의 만개를 마주하면 마음이 정갈해지고 진달래의 만개는 어린 시절로의 향수를 일으킨다. 벚꽃의 낙화를 배웅하면 황홀한 이별을 체험하는 기분이다. 그러나 꽃들이 어떤 시기에 제일 아름답든 어떤 모습이 아름답다한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현재의 삶이 고통과 괴로움에 가득 차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삶에서 봄이 있다는 말처럼 생의 언젠가 아름다운 시기가 찾아올 것이며, 이미 그 시기가 지나갔다 하여도 인생이 아름다운 시기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꽃이 꽃이기에 아름답듯이, 우리네 삶도 삶이기에 아름다울 것이다. 어떤 시기에 깃들어있던지 말이다. 그러나 가끔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 힘이 부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꽃을 보라. 한 해, 한 해 흘러갈수록 공기는 탁해지고 기온은 어디에 맞출지 모르게 춤을 추는데도 제 시기를 찾아내어 조금 이르게 피어 쌀쌀한 바람을 맞아가며 피더라도 있는 힘껏 만개하며 피어나는 꽃을. 나는 올봄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삶을 생각했다. 꽃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처럼 모든 인생도 아름답다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한없이 흔들리고 있기만 한 내 인생도 아름답다고.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시기가 언제인지도, 나는 언제 만개할지도 모르지만 있는 힘껏 다해 만개해야겠다고. 그렇게 살겠다고 나는 올해 활짝 만개한 꽃들을 보고 다짐했다.
어떤 시기를 겪고 있는 삶이든,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삶이든, 그 모든 삶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보고, 탄생과 죽음을 맞는 꽃의 순환을 보고 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비록 짧은 시간이어도 그런 순간들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의 그들의 삶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의 생을 더 사랑하고 더 활짝 만개하고 묵묵히 낙화해가는 그런 꽃과 같이 아름다운 삶들을 살다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