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지빠귀」를 읽고
무질은 이성중심주의로 대변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만을 중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성만 고착되는, 감성만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도 거부하였다. 그는 이성중심주의의 합리성과 감정적이고 신비한 사고를 하나로 엮어야 한다는 주제 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집필하였다. 따라서 무질의 지빠귀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살펴볼만하다. 본문에서 또한 “누가 얘기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당시 아츠바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화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얼핏 「지빠귀」의 전체적인 내용만 보면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이야기로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화자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신비적인 현상을 믿지 않은 지 오래인 반종교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의식하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비주의적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는 이성이 명료하며 두 친구 아아인스와 아츠바이 모두 반종교적인 성향을 학창시절부터 오랫동안 가져왔다. 또한 그들은 인간이 생리학적, 경제적 기계라고 믿는 유물론적 인간관을 고수해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당시 사회만 하더라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대두되는 모던의 사회였다. 모던 사회에서 인간은 그가 가진 이성의 합리성과 이성의 명료성을 통하여 계몽에 도달을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무질과 같은 작가를 통해서 그 이성의 합리성과 논리성에 대한 절대적인 맹신과 같은 인식들이 재고되기 시작했고 사실 상 인간의 삶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만으로는 설명 불가해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지빠귀」와 같은 소설을 통해 무질은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질의 소설에서 나오는 이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체험하는 신비하고 비합리적인 체험은 이 이성의 맹신에 대해서 경고하고 인간의 삶의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는 아츠바이의 입을 빌려 작가가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 세 이야기는 아츠바이가 동일한 느낌을 받은 경험, 체험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첫 번째 이야기는 그가 새벽에 들은 밤꾀꼬리, 어쩌면 지빠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새벽에 밤을 새우다가 환영과 같은 밤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어떠한 뒤집힌 경험,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환영", "마법" "몽롱"과도 같은 신비주의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며 이 경험을 통해서 아츠바이는 자신이 “음각된 조각상”, 뒤집힌 양말이 된 것 같다는 체험을 하게 된다. 또한 밤꾀꼬리를 “하늘나라의 새”라고 명칭 하면서 아츠바이가 신비주의적인 체험, 그동안 믿지 않았던 어떠한 신(神)적이고 종교적인 존재에 대한 조우를 한 것 같이 서술을 한다. 화자는 여기서 밤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마주하고 일종의 전환을 맞는다. 현대적인, 반복되는, 모두가 똑같은 삶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통한 전환이 감성과 신비의 비합리적인 세계와 조우하는 발판이 되고, 그가 마주해온 일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것으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그 밤꾀꼬리가 지빠귀였을 지도 모른다라고 얘기하는데 이는 오히려 이러한 전환을 맞게 하는 존재가 결국 허구적인 속성(다른 새들의 소리를 잘 흉내 낸다는 점에서)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으로 설정함을 통해 신비주의적인, 낭만적 세계만으로도 침잠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전시(戰時) 때 아츠바이가 겪었던 이야기이다. 이 신비한 체험이 현실의 어떤 지점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생과 사의 경계 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츠바이는 전쟁, 진지에서 보낸 하루가 얼마가 공포로 둘러 쌓인 일상들이었는지 묘사한다. 그 일상은 공포만이 가득한 그런 밤과 낮들이었다. 극단적으로 죽음과 직면하게 되는 상황에서 아츠바이는 역설적으로 생의 아름다움과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더 생생히 느낀다. 그러나 그가 속했던 전쟁이라는 상황은 개성이 무시되고 모든 것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계산되고 일반화되는 이성이 극도로 지배하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때 적기가 나타나 급박한 죽음의 상황을 소설은 아이러니하게 “이 광경은 너무 재미있고 사랑스럽기까지 했어.”라고 표현하며 이때 비치는 빛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나 “알록달록한 비단 종이”로 비유하기까지 한다. 이는 전쟁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죽음의 목전에 극도로 부각되는 생의 아름다움과 초연함에 대한 역설을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 또한 “생명의 광선”과 “죽음의 광선”, “신” “복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신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의 죽음이다. 이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겪었던 죽음을 마주했던, 그 순간에서 간신히 벗어나 생을 다시 한번 유지하게 했던 그 경험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적 대립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서 “의지, 감정, 느낌, 생각 등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온몸 전체가 관여하는 일종의 근원적인 결정”과도 같은 설명 불가해한 어떠한 힘을 “궁극적인 힘과 진리”라고 말함으로써 이분법적 대립 그 이상의 어떠한 힘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다. 또한 다락에서 만난 지빠귀와 만남은 아츠바이, 본인은 과거와 현재의 불가분 한 존재로서 인식하게 하고 과거에 만난 지빠귀라는 존재와 재회를 통해서 대립적인 것들에 대한 합일과 그를 통해서 나오는 어떠한 해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이야기도 소설의 마지막 단락 “세 이야기 모두 때마침 바로 그렇게 일어났을 뿐이야. 만약 내가 그 의미를 알았다면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을 거야.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소곤소곤 속삭이는 작은 소리나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의미를 분간할 수 없는 것들이야!”라는 내용을 통해서 작가는 이 이야기가 하나의 의미로 굳어지거나, 분석되고 그 의미를 고착화시키는 것이 무의미한 일임을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