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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Jan 20. 2018

사랑은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13. 사랑은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153: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은 항상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난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사랑은 결국 진리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 이제 주목받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과 진리는 역사로부터 수많은 입과 손을 빌어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현대에 와서 진리는 결국 허상으로 공허하게 밝혀졌지만, 사랑은 무엇인지 밝히지 못했다. 모두들 사랑을 개념이란 우리로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했고 지금도 누구도 사랑을 “사랑은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정의내리지 못한다. 노력하고 있을 뿐이지,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은 포기되지 않고 아직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있다.


  진리가 허상이라는데, 사랑도 진리처럼 허상이지 않을까? 잡히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공허하고 없기 때문 아닐까?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정의내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진리는 없는 것을 만든 것이지만 사랑은 실재하는 “너”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부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사랑하는 연인, 그 둘의 타자에게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으니 없다고 할 것인가. 분명 ‘너’는 실재하고 나는 나와 너 사이, 타자와 타자 사이에 나오는 연약한 언어로 잡히지 않는 것을, 잡을 수가 없어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러나 느낄 수는 있으니, 이걸 없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진리는 선악의 저편에서 사라지지만, 사랑은 선악의 저편의 일일 것이다. 진리는 선과 악, 진실과 거짓으로 분열되고 분열한다. 하지만 사랑은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사랑은 분명 선악의 저편의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도 붙일 수 있다. (그래 왔었고 :) ) 누구든지 사랑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누구든지 사랑을 말할 수 있다. 그곳에는 선악, 옳고 그름이 없다. 타자와 타자가 만나 사랑을 창조,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것은 보편하고 불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개념으로 잡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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