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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edie Feb 02. 2018

당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꿈꾸는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14. 당신그럼에도다시 사랑을 꿈꾸는가?

-영화“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에세이입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보고 난 사람들은 그녀의 ‘삶’(다른 말로는 ‘사랑’이 될 수 있는-그녀는 사랑할 때에 살아있었다-)에 경의를 느낀다. 나는 이 영화에서 신격화된 사랑이 아닌, 관계의 한계를 읽는다. 타자와의 관계 맺기는 비극적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타자와의 합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은 어찌 피해볼 수 있었을 것 같지만, 결국 결과는 우려하던 바대로 치닫게 된다. 수많은 비극들이 그 비극적 결말이 피할 수 없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타자와의 합일은 불가하다는 것이 자명하기에 이것은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조금 진부한 단어를 붙여 ‘한계’라 한번 말해보자. 내가 아무리 타자를 사랑해도 결코 내가 그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합일(合一)될 수 없다. 내가 네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마츠코가 경이롭다면 그건 그녀가 그 자명한 사실을 부딪쳐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을, 타자와의 ‘합일’을 꿈꾸었다는 점에서 경이로울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하려고 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자명한 사실이라면 더 이상 타인과의 합일을 꿈꾸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소위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어.”라는 선언과 같이 말이다. 마음을 주지 않고 가벼운 만남만을 반복하겠다는 결심과도 같다. 솔직히 사랑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처받고 고통받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에 계속 부딪치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계란을 던지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란을 계속해서 던지는 마츠코를 본다. 



  마츠코의 인생에 여러 남자들이 있었다. 작가 지망생인 데츠야, 데츠야의 라이벌인 남자, 이발사, 기둥서방부터, 그녀의 인생을 두 번이나 망친 류 까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이용한 남자들도 있었다. 후자의 남자들은 철저히 그녀를 대상으로만 보았고, 사랑한다 말한 남자들도 그녀에게 상처만 주었을 뿐이다. 마츠코는 여러 번 “인생이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それでもまだ。"(그래도 아직)라고 생각하며 다시 살아가고,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어쩌면 류의 말처럼 “무서울 정도”로 받고 또 받아들이고 주고 또 주었다. 마츠코에게 있어서 사랑은 “다시 한 번!”의 반복이었다. 마츠코가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달았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의 결핍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픈 동생 쿠미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뺏겼다고 마츠코는 생각했고, 그 결핍은 마츠코의 온 일생동안 떠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는 마츠코를 사랑했다. 그러나 마츠코는 아버지의 숨겨진 애정을 알아차릴 만큼 현명하지도 않았고, 애정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마츠코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다. 본인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해주고 받아줄 사람이 생기기를,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고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마츠코를 알아주고, 돌아봐줬다면 마츠코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함으로써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원했지만 사랑받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고 진정으로 사랑받지도 못했다. 마츠코는 "ただいま。"라고 말하면 " おかえり。"라고 돌아오는 답을 듣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다녀왔다고 말할 장소를 잃고, 어서 와라고 말해줄 상대를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결국 포기해버린 말년의 마츠코의 생은 혐오스럽다. 마츠코,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생이 결국 그런 결말로 이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생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신이 되었다. 불가능한 것이 자명한 사실이라면 하지 않는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그것에 매달리는 일은 정말 무용이다. 마츠코가 그 사실을 몰랐을까? 그녀는 매번 불합일의 경험을 마주했지만, 그러고 사랑을 버리기로 결심한 날들도 있었으나, 결국엔 다시 사랑했다. 계속 그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안에 가능성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신이 될 수 있다면, 어쩌면 그 합일의 불가능 속에 사실은 가능성이 숨어있는 것 아닐까?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될 수는 없지만, ‘너’와 ‘나’가 스며들어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우리’라는 합일을 이루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합일 불가능은 사실 자명한 사실이 아닐 수 있지도 않을까? 하지만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능이라는 것을 전제하에 겨자만 한 가능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보고 “다시 한 번!”을 외치는 일일 것이다. 


  당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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