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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 재 May 28. 2022

청설모의 튤립 사랑

녀석, 예쁜 것은 알아가지고...

한국보다 봄이 늦게 오는 애크론에도 어느덧 봄꽃이 다 지고 나뭇잎이 무성 해지는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이달 초에 찍어 놓은 꽃 사진을 보고 있으면 벌써 오래전 언젠가의 풍경을 보는 듯 낯설다. 온갖 봄꽃의 화려함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잔치를 벌이고 떠나갔다. 그중에는 음전한 색의 꽃도 있었고 화려한 색의 꽃들도 있었다.


화려한 색의 꽃이라면 단연 튤립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하나하나 생김새가 어찌나 예쁜지 멈춰서 구경하느라 아침 산책 시간이 매일 길어지곤 했다. 수시로 멈춰 꽃구경하고, 사진 찍고 하다 보면 아침의 걷기 운동은 운동이라기보다는 느릿느릿 도심 속의 계절을 만끽하는 플라뇌르(한가롭게 거니는 사람)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 어떤가! 봄인데. 


마침 튤립과 관련하여 재미난 장면을 보아서 소개하려고 한다. 그전에 애크론의 화려했던 튤립 모습을 모아 보았다. 


꽂꽂하게 꽃대를 올린 튤립은 언제 보아도 도도해 보인다. 두 송이가 다정하게 피어 있는 튤립, 한가족처럼 5~6송이가 무리 지어 피어있는 튤립, 정원이나 공원 한쪽에 가득 피어 있는 튤립, 마치 징검다리처럼 졸졸이 줄을 지어 피어 있는 튤립 등 피어있는 형태도 다양하고 색도 다양했다. 같은 색끼리 있어도 보기 좋고, 다양하게 섞여 있어도 보기 좋았다. 





그런데 작약 형태의 튤립은 머리가 너무 커서 그런지 꽂꽂이 서있지 못하고 꽃대가 휘어 꽃머리를 땅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괜스레 인간사에 빚대어 지나친 욕심은 몸을 망가뜨린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요즘 일어나는 인간사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상을 애꿎은 꽃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좀체로 안을 보여주지 않는 튤립이라 꽃송이를 벌이고 있으면 유난스레 안을 들여다 보게 된다. 꽃잎이 점점 더 벌어질수록 꽃의 수명은 다한 것인지 벌어진 꽃잎들은 이제 한 잎씩 땅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지는 튤립도 멋있다. 꽃잎을 한잎 한잎 땅에 떨구며 마치 이빨 빠진듯 꽃송이를 한칸 한칸 비워내는 튤립이 이상하게 싱싱한 튤립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인다. 때가 되면 땅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니까. 





튤립 소개는 그만 하고 튤립과 관련하여 목격했던 장면을 소개하겠다. 그날 아침은 여느 날과 달리 산책 루트를 바꾸어 윗동네를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 집 부근에 은퇴한 수녀님들이 사시는 수녀원이 있다. 무심히 그 앞을 지나는데 튤립 한송이가 떠다니는 것이었다. 무슨일인가 유심히 살펴보니 청설모 녀석이 튤립 한송이를 통째로 따서 입에 물고는 수녀원 입구의 전등 위에 올라가 꽃 아랫쪽을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누가 보고 있는 줄을 몰랐는지 그렇게 한동안 먹고 나서 갑자기 화들짝 놀란 몸짓으로 꽃을 떨어뜨리고 달아났다. 순간, '녀석, 예쁜 것은 알아가지고!'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녀석은 아마도 꽃 아래 꿀을 빨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청설모를 의인화하여 그 녀석을 바라 보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제대로 꿀을 다 빨지 못하고 도망간 것 같아서 미안했다.


가운데 전등이 있는 부분을 점점 확대해 보면...




아침에 청설모들이 먹이를 먹는 장면을 자주 본다. 몸통을 곧추세우고 몸을 지탱하며 두 앞 발로 먹이를 들고 오물오물 먹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귀엽다. 그런데 튤립을 통째로 입에 물고 오물거리는 청설모는 처음 보았다. 자기 머리통보다 몇 배는 커보이는 튤립 꽃을 통째로 따서 물고 전등탑에 올라가 튤립을 아침 디저트로 즐긴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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