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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알아낼 리 없는데」 9화

그제야 비가 내렸어.

by 아노 Art Nomad

「문지원 씨, 긴급체포 영장 발부되셨기 때문에 문 열지 않으면 저희가 강제 개방할 수 있어요! 문 열어요, 어서!」


참 내. 형사들도 뻥을 잘 치더라고. 체포영장만 가지고는 강제 개방하면 안 되거든. 나중에 내가 위법이라고 걸고넘어지면 어쩌려고.


그치만 밖에 형사가 딱 버티고 있는데 불이 내 예상보다 너무 느리게 번지니까 마음이 급했어. 그래서 라이터를 깨서 그 안에 라이터액으로 불을 좀 키울까 했지. 그랬더니 이번엔 불이 너무 크게 번지는 거야. 세상에, 라이터액이 그렇게 화력이 좋을 줄이야.


그때부턴 정말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생각할 수 없었어. 불이 너무 크게 붙으니까 이러다 증거인멸이고 뭐고 집을 다 태워 먹게 생긴 거지.


급한 마음에 이불을 갖다 던졌어. 왜 화재 진압할 때 공기를 차단하려면 이불로 덮으라고 하잖아. 근데 공기 차단은커녕 불이 더 커지더라고.


「뭐, 뭐야. 연기 아니야, 이거? 불 냄새난다, 불!」

「소방, 소방 지원 요청해! 문지원 씨, 빨리 이 문 열고 나와요!」


매캐한 연기에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어. 이럴 거면 그냥 화장실 문을 닫는 게 낫겠다 싶어 닫았는데, 닫는 순간 아뿔싸했어. 우리 집 화장실 문에 문고리가 없었거든. 원래 세 들어올 때부터 그랬어. 문고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구멍만 있었지, 젠장. 그래서 다시 열었어. 근데 그 구멍으로 이미 불이 번진 거야. 오래된 나무문이라 불이 옮겨 붙자마자 순식간이더라고.


「문지원 씨, 그러다 죽어. 빨리 나오라고! 이 형사, 소방 어디래? 뭐? 아직? 야, 안 되겠다. 이 형사, 오 형사! 여기, 지키고 있어. 난 아랫집에 가서 베란다 타고 가볼 테니까.」


밖에서는 난리고 안에서는 이 지랄이고. 진짜 정신 쏙 빠지더라고. 그때였어. 갑자기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나한테 날아오더라. 문에 맞고 나서야 생각이 났어. 내가 화장실 콘센트에다 드라이기 꽂아놓은 거.

「아저씨, 여기요! 빨리!」


밖에서 문 따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어. 쳐들어온다는 게 뻥이 아니라 차라리 다행이었지. 나중에 이거 다 주거 침입이라고 들이대 볼까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뭔 오징어 탄 내가 나는 거야. 내게서 날 줄 몰랐던 지옥문을 여는 냄새 말이야.


끄아아―!


비명을 참을 수 없었어. 그건 내 시뮬레이션 안에는 없던 일이었거든. 내 다리가 타들어 가는 상황 같은 걸 어떻게 미리 연습할 수 있겠어?


끄아아―아아!!


내가 두 번째 비명을 지를 때쯤, 아랫집 베란다 창을 통해 올라온 경찰과 도어록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이 거의 동시에 우리 집에 들어왔어.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타들어 가는 문짝 밑에 깔린 내가 본능적으로 외쳤어. 간절하면 절로 나오더라고 그 말이.


그 사고로 이렇게 된 거야. 두 다리 없는 죄수, 처음 보지?


날 체포한 형사가 구급차를 불러서 생명에는 지장 없었지만 다리는 살려낼 수 없다더라. 근데 그 형사 일 참 잘하더라고. 엠뷸런스에 누워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그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어.


「문지원 씨 부천원미경찰서 강력계에서 왔고요, 당신을 춘덕산 일대 연쇄살인 용의자 박상진 씨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현재 시각…」


난, ‘아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다리도 이 지경인데 동정여론을 사면…’ 하는 생각을 하다 기절했어.


… 휠체어를 타고 현장 검증하러 가는 날이었어. 형사들이랑 같이.


집에 들어서는 걸 기자들이 막 찍고 그랬지.


문이 딱 열리자마자 난 내 다리가 둘 다 없어졌다는 것도 잊고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다 그대로 고꾸라져 나 뒹굴었어. 나뒹굴면서도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 눈을 뗄 수 없더라고.


우리 집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화장실이 정면으로 보이는 구조였거든. 그때 내 시야에는 화장실 문 옆으로 10여 년 전 내가 화형 시킨 그 복사나무가, 매일 밤 꿈에서 나를 괴롭히던 그 활활 타오르는 나무가, 내가 고양이를 매달았던 그 모습 그대로 동쪽 가지를 천장까지 길게 뻗고는 나를 내려다보더라.


쏴아아 아―.


밖에는 그제야 비가 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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