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꿈, 스크린 위의 삶
첫 번째 무대와 꿈의 시작
책장 앞에 선 소녀의 손끝이 떨렸다. 종이의 거친 결과 먼지 냄새, 그 사이로 스며드는 잉크의 향기. 펼쳐지는 활자 하나하나가 작은 문이 되어, 나를 낯선 세계로 이끌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책 속에서 끝없이 변주되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날은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 바람과 대화했고, 또 어느 날은 별을 세는 시인이 되었으며, 바다를 가르는 선장이 되기도 했다. 책 속 인물들의 용기를 빌려 현실의 두려움을 견뎌냈고, 문장 속에 숨어 있는 고독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빚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도, 결국은 책 속에서 길어 올린 파편들에서 비롯되었다. 무대 위에서,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브런치의 빈 화면 앞에서 나는 여전히 그때의 소녀와 마주한다. 연기할 때 나는 대본 속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 캐릭터의 입장에서 말한다. 글을 쓸 때는 반대다. 내 가장 깊은 내면을 끄집어내어 문장으로 직조한다.
엇갈려 보였던 두 길은 사실 한 점에서 만난다. 누군가와 이어지고자 하는 오래된 갈망,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
두 번째 무대
브런치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배우로서 아직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때, 글은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되어주었다. 『SKY를 나왔지만 백수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며, 포장되지 않은 민낯을 내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이력 뒤에 가려진 불안과, 연기에 대한 절실한 열망을. 그 솔직함이 뜻밖의 울림이 되어 닿았나 보다. “나도 같은 방황을 겪고 있어요.”라는 공감의 메시지, “당신의 글이 위로가 됐습니다.”라는 고백들이 달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글은 공유되는 순간,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만드는 다리라는 것을.
새로운 무대로의 초대
얼마 전 트레바리에서 북클럽 파트너 제안을 받았다. 브런치에 흘려보낸 글을 읽고, 책과 대화를 매개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으리라 믿어준 것이다. 소속사 없는 배우라는 현실 앞에서 종종 작아지던 내가, 글쓰기와 독서라는 무대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중심으로 한 대화 속에서, 나는 배우로서 표현하는 인간의 결을, 작가로서 기록한 사유의 층위를 함께 나누고 싶다. 글이 나를 연기와 현실 사이에서 이어주었듯, 이제는 대화 속에서 또 다른 무대를 펼쳐가고자 한다.
글과 연기가 만나는 순간
올해, 오랫동안 품어온 소망 하나가 현실이 되었다. 내가 직접 쓴 시나리오가 독립영화로 제작 확정이 되었고, 그 영화에서 얼떨결에 주연을 맡게 된 것이다. 내가 써 내려간 문장을 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내 몸으로 살아내는 경험. 글과 연기가 서로의 숨결이 되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종이 위에서 태어난 인물이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일 때,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배우로 서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닿아, 오래도록 머무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미래를 향한 다짐
나는 여전히 꿈꾼다. 언젠가 브런치에 흩뿌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 그 책 속 문장들이 누군가의 어두운 하루를 환하게 밝혀주기를 바란다. 영화 속의 배우와 종이 위의 작가, 두 얼굴을 오가며 나는 결국 같은 목표를 향해 걷는다.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일. 단 하나의 문장이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고 단 한순간의 연기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별처럼 박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작은 울림들을 차곡차곡 쌓아, 언젠가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로 세상과 나누고 싶다.
브런치에서 시작된 작은 기록이 영화의 스크린으로 번져가기를. 모든 연결의 시작점에서 나는 다짐한다. 글은 내게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앞으로를 향해 뻗어가는 다리다. 그 다리를 건너, 배우이자 작가, 기획자로서 삶과 예술을 하나로 묶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책장 앞의 소녀가 품었던 모든 꿈을, 이제는 어른이 된 내가 세상 속에서 꽃 피우고 싶다. 그 다리 위에서 나는 쓰고, 연기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