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모든 순간 속의 수련
예전에는 요가 아사나 수련 하는 시간만 수련한다고 생각했다. 집중하고 인내하고 성취하는 그 시간이 수련이라 생각했다.
예전에는 방석을 깔고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명상이라 생각했다. 머리 속 온갖 잡념을 없애고 고요해지는 것. 짧게나마 한 명상이 내 삶을 바꿔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매트와 방석 위를 벗어나면 그 평화와 이완의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족들은 불편했고, 주변 사람들 눈치를 봤다. 때때로 가라앉은 슬픔과 외로움을 헤집고 내 마음을 흙탕물처럼 만들어버리던 사람들. 원망스럽기도 하던 삶은 여전히 모순덩어리였다. 요리하고 청소하는 집안일은 하기 싫지만 해야하는 미뤄고픈 숙제와 같았다.수련 시간 외의 일상과 만남은 따분하고 쓸데 없이 느껴졌다. 돈을 벌어야 하는 날이면 바짝 날이 서 있어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버렸다.
잠자리에 돌 몇개가 굴러다니는 듯, 그렇게나 불편한 일상이었는데도 그러려니 했다. 삶을 꾸려나가는 것은 으레 그런거려니 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폭풍우 치던 새벽에도, 눈보라에 자동차가 비틀거리던 새벽에도, 다리를 절뚝이고 담에 걸려 목도 돌아가지 않던 새벽에도, 그래도 멈춤없이 계속 되었던 새벽수련 덕분일까.
"나는 무엇인가."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공간이 틈새가 벌어질만큼 조금씩 넓혀져간 덕분일까.
이제는 아침에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화분에 물을 주고 식물의 잎을 사랑으로 닦아주는 것에, 매일 하는 청소와 시간을 들인 채식 요리 속에 아사나 수련과도 같은 인내와 정성이 깃든다.
기분 나쁘고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 그 순간 호흡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의식적 노력은 명상을 위해 방석에 앉아있을 때를 벗어나 일상의 평범한 순간속에 조금씩 스며들어간다.
내 곁에 다가온 모든 사람들은 늦든 빠르든 결국 신의 이름으로 머물며 내게 가르침을 주고 떠난다는 것을, 삶은 모순이 아니라, 완전한 우주자체임을 알아차린다.
어쩌면 예전보다 지금이 더욱더 자주 솟구치는 불편하고 부끄러운 감정에 몸부림치는 시간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 있든 깨어있는 모든 순간 속에서 수련이 계속 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