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게 모든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한다. 마늘과 양파와 고추를 좋아하는(이러한 라자식 음식들은 활동성을 증가시킨다) 민족성향상 정말 한국인들은 뭐든지 열심히 하고 뿌듯해하고 그 결과를 두 눈 반짝이며 기대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 결과를 승패로 나누고 집착을 한다.
특히 운동을 할 때 당연하게 "열심히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몇 키로 살 빼기를 목표로, 또는 체지방 몇 프로 이렇게 수치화시켜가면서.
요가의 카테고리는 자주 운동쪽으로 나뉘어져있기는 하지만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철학이나 종교 쪽에, 더 자세히는 진리를 찾는 여정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인 몸의 건강이나 오락을 위한 스포츠로 한정지어 생각하면 이해가 어렵다.
"도를 닦으시렵니까?"로 접근하는 것보다 "살이 빠져서 건강하고 예뻐지시렵니까"로 접근하는 쪽이 더 대중적으로 전파하기가 쉽다. 일단 이쪽 길로 꼬실 때는 그걸로 꼬셨다가 차차 "도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하는게 현대사회에 요가를 전파한 스승들의 현명한 전략이었던 게다.
어쨋든 그러한 초기 전략이 잘 먹혀 여전히 요가를 처음 접하는 우리는 운동에 대치해 생각하기 때문에 요가 또한 운동처럼 열심히 하려고 한다. 한계를 넘어보겠다며 땀을 뻘뻘 흘리기도 한다. 매일 매일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자세로 만드려고 낑낑 대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운동성으로 재편성된 요가가 아닌 전통적인 요가에서의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 "진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무지와 고통에서 멀어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초점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되 분별력을 가지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라는 쪽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얘기하면 미래보다 바로 지금 여기의 현재에 충실하라는 소리이기도 하고.
때문에 유연성과 근력의 증가, 체중감소와 같은 일반적인 운동과 비슷한 효과는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오히려 전통요가를 수련하면 집중력의 증가, 현재에 머뭄에서 오는 마음의 고요함의 만끽, 이완과 휴식, 긴장의 해소,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게 된다.
요가자세에서 머물때 집중이 아니라 집착을 하게 되면 아래와 같은 상태가 된다.
- 언제까지 버티는거? 아 쌤. 진짜 넘하시다 ㅠ - 와. 쟤는 엄청 잘하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다. 입으로 숨을 쉰다
집착이 아니라 집중을 하고 있는 상태는 아래와 같다.
- 눈을 감고 있다. 시각에서 오는 자극을 차단한다. - 호흡이 고요하고 안정적이다.코로 숨을 쉰다. - 아무 생각을 안한다. 선생님의 목소리만 내 몸을 최면처럼 이끈다. - 자세를 통해 내 몸에 전해지는 자극을 주시하고 있는 의식이 있다.
전통요가를 수련하는 곳에서 요가를 하면 요가는 운동이 아니라 명상에 가깝다. 몸을 도구로 사용하는 명상.
요가를 수련하는 우리는 대부분 운동으로 요가를 접했을 것이다. 댄스에 비하면 지루하고, 헬스에 비하면 근육운동이 부족하고, 스포츠에 비하면 성과가 눈에 안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요가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산만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영적인 평화를 얻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러니 집착이 생길만큼 요가를 열심히 하지 마라. 그저 규칙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라.
빨리 좋아지지 않는다고 조급해마라. 요가의 목적은 빨리 몸이 좋아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련을 하는 순간 순간에 집중하고 지켜보고 그렇게 함으로서 몸에 대한 집착과 생각, 감정, 욕망에 대한 집착을 흘려보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요가수련을 하며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안되던 자세가 갑자기 된다거나, 전보다 더 오래 자세에서 머물 수 있다거나, 살이 빠지고 몸매가 좋아졌다거나 그런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요가 수련의 성취는 마음이 전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워졌는가에 달려 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어쩐지 요즘 너 얼굴이 편안해보여"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면 요가에 성취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요가 자세를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집착을 하게 되면 그 평화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체 집착말라는게 뭔 소리냐며 내게 화두를 던진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인 내 친구는 이미 나보다 더 훌륭한 요가 수련자이다. 비록 몇 년 째 요가를 해도 나무 자세에서도 비틀비틀 발란스를 못 잡긴 해도 말이다.
아이들이 커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고 큰 인물이 되어 자식자랑 좀 해볼려고 자식 농사 짓고 있는 게 아니니까. 신이 나에게 잠시 맡겨 놓은 아이들일 뿐으로 여기며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최선을 다해 해나갈 뿐. 아이들은 내가 원하는대로만 커가지 않을 것이고 어떤 어른이 되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아야함을 깨닫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을 키워나가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주고 받음에만 집중하고 만족해야함을 매순간 배우고 있는 셈이다.
즉 대상이 다를 뿐 요가가 전하는 본질은 마찬가지다. 세상 수련 하기 완벽한 조건을 갖춘 아쉬람에서 나 몰라라 혼자 명상/호흡/요가수련만 하고 있는 나보다 그녀가 현실에 머물며 더욱 더 치열하게 자신만의 수련을 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