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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영 Jun 09. 2022

미술을 처음 해요

선생이 되어 만난 미술



“내년에 학교를 가야하는데,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어요.” 민호 엄마가 말했다. 

“민호에게 특별히 미술활동을 하도록 뭘 사주거나 도와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하게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통 뭘 그리지 않아요.”

그렇게 8살을 목전에 둔 민호와 만났다.      


민호는 조금 주저하다가 조심히 교실에 입장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점이어서 ‘겨울’을 주제로 수업 중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준비한 시각자료 이미지들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스케치 중이었다. 

민호에게는 자료를 보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시작 해 보자고 했다. 

민호는 머리를 긁으며 부끄러워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았지만 좀처럼 민호의 긴장모드는 가시지 않았다. 

민호가 스스로 결정을 못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다른 아이들도 의식하고 점점 시작이 어려워질거다. 하얀 도화지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자는 것은 민호에게 공포로 작용하게 될 것 같았다. 오늘 미술의 첫 단추를 잘껴야 할텐데.


“민호야, 아까 올 때 춥지 않았어? 선생님은 엄청 춥던데. 오늘 바람 많이 불더라.”

민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겨울에 뭐 하는 거 좋아해? 겨울하면 생각나는 거 있어?” 나는 계속 민호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걸었다.

옆에서 다른 아이들은 스키장이며 눈썰매, 산타할아버지와 선물, 여행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었다. 한참 후, 민호는 눈사람에 반응했다. 

“눈사람 만들어본 적 있어? 그럼 그때 어떻게 만들었어?” 

“우리 눈사람 그럼 그려볼까?”

민호가 처음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동그라미는 작았다. 


연필 잡는 자세를 살폈다.

연필을 가까이 잡고 있어서 연필을 쥔 손이 종이를 가리고 있었지만 손에 잘 쥐고 있었다. 그런데 연필을 가까이 잡고 있다 보니 종이에 그려지는 그림을 보려 고개를 숙이게 되고, 힘을 준 손 때문에 그림은 작고 경직되게 그려졌다. 시야가 좁아져 작은 그림이 나오는 거다.

대담하게 그릴 수 있는 편한 상태도 아니었고, 경직된 마음은 자세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호에게 바로 말하진 않았다. 민호는 오늘 처음 동그라미를 그렸기 때문이다.


“와~ 민호야, 눈덩이 얼만하게 만들었어? 위에도 쌓았어?” 

민호는 위에 한 개의 동그라미를 더 그렸다. 그리고는 무얼 그릴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난 민호와 눈사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겨우 잡은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눈사람이 있는 여긴 어디야?

와~ 눈사람 엄청 춥겠다.” 

민호는 끄덕였다. 

“어떤 표정이야?” 

민호는 웃고 있는 표정을 그리고, 선을 그어 눈사람에 양팔을 그렸다. 민호는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랐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니 점점 그림을 그려갔다. 눈사람 옆에 트리모양의 나무도 그렸다. 민호가 사람을 어떻게 그리는 지 궁금했다. 

“눈사람은 누가 만들었어?” 민호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대화를 끌어나갔다. 민호는 딱딱한 자세로 서있는 사람을 그렸다. 그리고 색연필로 칠했다. 종이에는 눈사람, 나무, 사람 이렇게 세 가지가 작게 그려졌다. 풍부한 이야기가 담기진 않았지만 찬찬히 처음 뭔가를 그리는 민호의 경험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미술을 하거나, 미술에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가 있을 경우는 나는 늘 더 조심했다. 혹시 친구들이 무시하거나 놀리는 반응이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다행히 30분 이상 아무것도 안하고 있던 민호를 아이들이 이상해 했지만 아무도 놀리진 않았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민호 옆으로 와서 말도 걸었다. 민호도 몇 마디씩 나누며 적응해갔다. 


첫 수업에서 민호는 무엇을 그릴지 몰랐다. 

미술이 놀이나 본능처럼 자연스럽게 시작된 경우가 아니여서 더 그랬다. 첫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두 번째 수업을 민호와 무엇을 할지, 아이들과 어떻게 조화롭고 생기있게 이끌어 갈지, 그날 밤 난 고민이 깊었다.

민호는 미술을 끝까지 하고자 했다. 오랜 시간 아무런 선도 긋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킨 민호, 집에서 그림 그리는 것에 노출 되지 않아서 첫 그림에 막막했던 그 심정, 몇 번씩 미소 지으며 대답했던 것을 떠올렸다. 민호에게 오늘 미술에 대한 인상은 어땠을까.
 

다음 몇 번의 수업에서는 생각이나 상상의 그림보다는 명화를 그려보거나, 실물을 보고 그려보기, 재료의 기법으로 즐거움이나 우연적 효과를 실험했다. 민호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해야 되는 그림을 한 달 정도는 일부러 미뤘다. 사진, 명화, 실물, 정물 등을 보고 그리는 것은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거나 생각할 부분이 다소 적다. 그 후 생각 그리기 활동을 자연스럽게 조금씩 추가했다. 

막연히 스스로 하는 것에 민호가 공포가 있을 거라 여겼고. 미술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즐겁고 편한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하고 싶었다.


민호는 굉장히 밝은 아이였다. 미술에 점점 자신감이 생기자 재밌는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쳤다. 미술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 날 수업에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갔다. 그렇게 민호가 미술을 시작하고 2년 정도가 다 되어갈 때쯤, 수업을 위해 책상에 여러 개 화분을 올려놓은 날이다.     

아이들이 어떤 화분에서 영감을 받을지 궁금했다. 민호는 화분을 종이에 턱턱 배치하며 그려갔다. 연필로 그리면서 느낌 가는대로 명암을 넣고, 색연필로 채색하며 자유롭게 패턴도 넣었다. 난 ‘민호체 그림’이어서 감탄했다. 처음 도식적인 기호와 같은 동그라미와 세모로 눈사람을 그렸던 민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술은 보통 어렸을 때 경험한 느낌이 강렬히 자리 잡는다. 누군가에게는 미술은 굉장히 어렵고 창피한 과목으로 남기도 한다. 도화지 한 장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감각표현력상상그리고 심리적 상태와 마음이 종합적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더구나 아이같은 본능이 사라지고 조금 늦게 미술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에 4년이 걸렸지만,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데에는 평생이 걸렸다“
 _파블로 피카소     


그림을 시작 못하는 이유에는 주변의 반응도 크게 작용한다. 자신에게 집중된 분위기라던가 놀리는 분위기나 과한 격려는 더 위축하는 상황을 만든다. 조금 커서 만난 아이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내 그림이 맞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을 구분하고 있는 ‘눈치’가 생기고 사회화된다. 미술에 있어서 이 눈치는 참 불편한 존재다.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막고 있는 것도 눈치여서다.     


처음 미술에서 무엇을 그릴지 몰라 주저했던 민호.

가만, 민호가 그 때 미술을 계속 하지 않았더라면 민호에게 미술은 어떤 인상으로 남았을까. 혹 미술이라는 걸 아예 마음에서 지우거나 시도조차 안해보진 않았을까. 아니면 다른 기회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어찌됐건 이제는 상관 없다.

처음 딱딱하고 경직된 민호의 연필 선은 몸을 유연히 물 흐르듯 움직이는 자세로 바꼈다. 민호는 모를 거다.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 피아노를 치듯 손과 몸이 자유로이 움직인다는 것을.      

        


민호. <4개의 화분> 실제 화분을 관찰하여 그리다가 생각이 발전하여 자신 만의 패턴과 명암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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