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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영 Aug 29. 2023

은둔하는 날


“박사과정을 통한 최종 목표가 뭔가요?”


     

“박사과정을 통한 최종 목표가 뭔가요?” 대학원 면접 중 교수님이 물었다.

 (아 목표는 없는데) “공부가 하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내 말을 믿지 않는 건지, 목표와 의욕이 없어 보인 건지, 교수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다행히 합격했고, 학생이라는 신분을 오랜만에 챙겼다.     


숙제가 주어지는 새로운 변화가 버거우나 생기로웠다. 전공 서적과 논문을 읽으며 몰랐던 학자들을 알아가며,내면에서 솟아나는 질문들이 좋았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교육 현장에서 시도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좋았다. 어떤 영감 같은 것이 일렁거리는 기분같은.

그것은 소진되는 삶에서 생산하는 삶으로 옮겨가는 기분이 이었다.




엄마역할, 사장역할에 학생역할이 추가되자 자주 허둥지둥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거의 매일 학교 과제를 했다. 학교를 다닌다고 학원일에 소홀할 수 없고, 일하고 공부하는 엄마여서 아들을 소홀히 키울 순 없었다, 내가 스스로 벌린 일들에 따라 딸려오는 나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다중역할에서 나의 최선을 다해보는 것. 그것이 내가 택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자주 이런 일들도 생겨났다. 한 날은 이웃 엄마가 전화 왔다.


만나지 못하는 미안함에 공부 중이라 말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하니. “욕심이 많네”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가 “애 공부는 어떡하려고?

또 어떤 이는 “그렇게 까지 안 해도 학원 잘 되잖아”

또 다른 이는 “어떻게 그걸 다 해”

친언니에게 바쁘다니까 “그러려고 공부하냐”


이쯤 되니 마음이 불편하다.

나 좋아서 하는 공부에 눈치를 보는 실정이 되었다.

그야말로 내적 동기란 놈은 너무도 늦게 찾아와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나.      

내적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은 자발적 에너지가 넘치고 주변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는데. 이것마저 엄마 현실에선 다르게 작용하나 보다. 물론 내게 안부를 묻고 만나자고 연락해 주는 사람들이 좋은 마음에 하는 말 인걸 안다. 하나 이런 말을 듣자니 나는 이러면 안 되는 건가 싶어 분도 났다. 마흔쯤의 나이가 되니 이제 좀 하고 싶은 것이 선명히 보이는 것 같은데, 이건 안되는 건가? 엄마가 애 안 키우고, 공부하는 거.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왜 책 읽고, 공부하고, 학교 가고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되었을까. 드라마나 예능을 보거나, 사람과 만나 놀거나 카톡을 하고, 수다를 떨던 나인데. 왜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졌고. 업무 외 카톡을 읽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는 6일 학원에 출근하며. 1호점과 2호점을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을 만난다. 선생님과 아이들. 학부모. 또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 원과 연루되어 사람을 만나고 대하다 보니, 출근이 마무리되는 6일째 토요일 오후에는 긴장도 풀리고, 늘 낯선 피로가 왔다.

또 머리는 24시간 일 생각이다. 매 순간은 아니지만, 한순간도 일에서 빠져나온 적이 없었다. 무엇을 보고 떠오른 생각은 모두 일과 연결된 사람으로 이어졌다.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Phil Knight)의 「슈독」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삶이 온통 일뿐이고 휴식이 없을지라도. 나는 일이 휴식이 되길 원했다.               


내가 그랬고 그러길 바랐다. 그런데 점점 ‘난 그렇겐 절대 못살아’를 외치고 있었다.

일을 하다 보니 몰랐던 일의 무게감이 조금씩 덮쳐왔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쌓인 피로는 나를 조용히 짓눌렀다.


나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일은 제대로 하고 싶은데, 일에 치이는 느낌을 받기는 싫은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지?

이렇게 계속 학원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쉬고 싶은가?

다른 일을 하고 싶은가?


내게 질문에 질문을 했다. 나는 쉬고 싶지 않았다. 내 일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 안에서 올라오는 다른 무언가를 갈망했다. 학원은 잘 되어 갔지만, 무언가 계속 미진하다고 느꼈다.

미술은 너무 크고, 나의 미술은 함량 미달 같았다. 현장 중심 미술에서 빠진 뭔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미술을 가르치지만, 가만 생각하니 나는 미술을 잘 몰랐다.

내가 몰두할 다른 무엇. 그렇다고 쓸데없는 시간은 아니어서 내게 필요하고 도움이 될 그런 것.

그래. 공부해야겠다.


그렇게 마흔이 넘은 나이, 학교를 가기로 했다.     

학교를 가는 건 미지의 섬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학교를 오가는 차 안이 행복했다. 운전대를 잡으니 생각도 잘 났다.

바깥 풍경도 좋고 흘러나오는 라디오 클래식도 좋았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꽃과 나무, 학교 건물의 고전적 모습과 가로등. 학교 잠바를 입은 대학생들을 보는 것. 교정을 혼자 걷는 것. 강의하는 교수님의 표정, 어조, 어감, 어색. 교수님의 언어와 사유. 학생이 되어 좋았다.           


학교 가는 날은 내게 공식적인 은둔의 시간이다.

일과 육아에서 빠져나와 어떤 경계를 넘는 기분. 오롯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도피처. 내게 주어진 역할에서 분리되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그런 공간.

나는 발산만 하고 응축하지 못했던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생각이 자유롭고 많아졌다. 이렇게 응축한 시간에 마음에 들어온 것들을 양분 삼아 다시 학원으로, 집으로 복귀했다. 개운했다.


「은둔의 즐거움」 신기율은 나를 지치게 하는 세상과 적당히 멀어지는 연습을 하라 말한다. 누구나 은둔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을 강권한다.           



학교를 다녀오는 차 안



사실 반복되는 일상에선 이런 생각을 할 틈이 생기지 않는다. 나와 만나는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할 때만이 내면에서 두드리는 답을 얻을 수 있다. 나를 가장 최우선에 두고 생각과 고민에 몰입해보는 거다.

내 안에 어떤 갈망과 두려움이 있는지. 어떤 요구가 있는지.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은 삶의 순간을 찍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랬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우리는 결정적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잠시 하던 것을 내려놓고 당신도 챙겼으면 한다.


당신의 은둔을.  


  





미술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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