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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미 Dec 14. 2023

자존감 도둑은 나였다.


백수가 된 지 7개월 차, 내가 무엇을 하든 시간은 참 빠르게 간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괴롭게 하여 시작한 피아노와 수영도 벌써 6개월 차에 접어든다.


여름에 시작한 만큼 의욕도 앞서 있었고 새롭게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기분을 꽤나 들뜨게 했었다.

수영 장비들도 새로 사들이면서 기분 전환을 했고 처음 접하는 피아노이기에 시작해보지도 않고 피아노부터 사야 연습을 할 수 있을 거라며 남편을 곤란하게도 하였다. 결국 이 핑계 저 핑계로 디지털 피아노 한 대를 기어이 들였다. 남편은 당근에 언제 나가냐고 매일 놀리지만;;


여태껏 꾸준히 해본 적 없이 이것저것 시도만 하다 끝나버린 취미가 많았기 때문에 수영과 피아노는 무조건 평생 취미로 가져가겠다는 결의가 대단했었다.


“목표가 없어도, 어딘가를 향하지 않더라도”란 마음으로, 못하면 어때,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니까 꾸준히 즐겁게 배우면 되지, 이러한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처음은  그렇게 호기롭게 시작하였는데 막상 모르던 세계에 들어가 보니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잘 알고 싶은 욕심은 커져갔다. 하지만 마음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처음 열정은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점차 연습을 게을리하게 되었고 당연히 실력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수영은 좀 나았다. 같은 반에 고만고만한 분들이 섞여 있기도 하고 내가 잘 못하는 평영이나 접영을 하라고 하면 잘하는 분들을 앞세우고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어찌어찌해낼 수는 있어서 그나마 좀 나은데 피아노는 달랐다.


워낙 타고난 박치인 데다 학창 시절 음악 과목도 어려워했기 때문에 내가 잘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접고 시작했다. 단지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클래식 음악을 배워 보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다.


그냥 못해도 엉덩이 무겁게 있다 보면 수영처럼 영법 하나하나 깨우치는 날이 오겠지 하면서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땀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피아노는.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았고 악보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느낌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진도를 여러 개 걸쳐 연습을 해오라고 하니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제대로 안되어서 진도가 더디었다. 그리고 꾸준히 앉아서 연습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피아노는 일대일로 잠깐씩 진도에 맞춰 봐주는 식이다 보니 연습을 제대로 안 하고 가는 날에는 더욱 위축이 된다. 꼭 숙제 안 해 온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상하게 혼자서 잘 되던 연주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한번 해보실게요 ‘라고 하기만 하면 긴장을 한 탓인지 제대로 연주가 되지 않는다.


더딘 진도에 ‘아 선생님도 얼마나 지루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눈치가 보였고 마치 내가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주눅이 들었다. 그냥 선생님이 빨리 나가주셨으면 하는 생각에 정신없이 피아노를 친다. 뚱땅뚱땅


어느 날엔가 이렇게 소심하게 쭈뼛쭈뼛 대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뜻밖에 말씀을 하셨다.


“왜 이렇게 자신이 없으세요? 연주에 너무 자신이 없어요. 콩쿠르 나오는 분들 중에 실력이 조금 안되더라도 연주를 잘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포장을 잘하는 분들이 있어요. 반면에 실력이 좋은데 포장을 잘 못하는 분들도 있고요. 아름 씨는 포장을 잘 못하는 분 같아요. 당연히 처음 배우시고, 특히 성인들은 바쁘셔서 피아노 연습에 많이 할애를 못하시는 게 당연하잖아요. 아름 씨는 그렇게  못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자신감이 없어요, 혹시 평소에 완벽주의 성향이 있으세요?“


건조한 말투에 무심하게 내뱉은 선생님의 말씀에 난 적잖히 당황하였다. 정곡을 찔린듯 했고 심리적으로 간파를 당한듯하여 순간 어버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열심히 친다고 쳤는데 연주에 자신감이 있고 없고가 느껴진다는 말이야?’ 사실 더욱 뜨끔했던 이유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포장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뭔가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법을 모른다. 항상 전 잘 모릅니다. 못합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완벽주의자는 아닌데, 제가 잘하는 부분보다 항상 잘 못하는 부분이 눈에 띄어요. 그래서 그 못하는 부분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부분에서 실수가 난다 그러면 그전 마디부터 긴장이 되고 부담이 돼요.”


나의 말에 선생님은 가볍게 넘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완벽주의자는 아니다. 완벽주의자라면 오히려 모든 걸 꼼꼼하게 어떻게든 해내려고 할 텐데 난 그 정도의 의지도 안되고 꾸준한 노력도 안 할 거면서 집착만 하고 있으니 완벽주의보다는 집착쟁이에 더 가까운 부류일 것이다.


사실 이런 나의 성격이 피아노 연주에 담기리라 생각을 못해봤었기 때문에 조금은 놀라웠다. 정말 감추고 싶은 치명적인 단점인데 그것을 간파당하다니...


그냥 좀 부족해도 ‘이 나이에 피아노 배우는 일 자체가 너무 멋진 일 아니야? 그래 내가 입시 준비 하는 것도 아니고, 취미 수준으로 하는 건데 이 정도도 훌륭하지, 처음을 생각해 봐. 아니 당연히 못하니까 선생님이 있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좀 뻔뻔해져도 될 텐데 난 모든 순간 너무 긴장 상태에 있다. 내가 이만큼 밖에  모르고, 이만큼 실력 밖에 안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란 생각이 날 더욱 위축되게 하였던 것 같다.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매사 엄격한 나. 엄격한 만큼 또 노력은 안 한다... 이 부분이 나를 자주 괴롭게 한다. 왜냐면 너무 잘 아는데 개선이 안 되기 때문이다. 편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정하면  좋을 텐데.

즐기고자 한 취미 생활에서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나를 자책하고 있다니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니 자괴감이 밀려왔다.


지나치게 솔직하기보다는 뻔뻔한 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자기 합리화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기반성으로 괴롭기만 하니 자존감 도둑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본래부터 자존감이 높아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인생이다. 자존감을 선물한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해야 한다. 내가 여지껏 살면서 느낀 것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자존감’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누구나 아는 단어이지만 지키고 살기란 꽤 어려운 일이니까.


나를 먼저 사랑하는 일. 나에게 제일 먼저 괜찮다고 토닥여 주는 일. 우리는 상심한 타인들에게는 측은지심을 보이면서 스스로에게는 지나치게 채찍질만 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너무 괜찮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견뎌야 할 숙명인 것인가?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이럴 때 한 번쯤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이미 우리는 수억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나라고... 그것부터 위너의 탄생이 아니겠는가.


하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몸도 으슬으슬하다.

내일 아침 또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가야 한다. 연습은 또 양껏 하지 못했다. 여전히 부담스럽고 내 손가락은 맘처럼 되지 않겠지만 내일은 자존감을 도둑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에게 도둑맞는 자존감은 배로 아프니까.

 

먼 거리에서 히끗히끗한 머리를 하고 피아노를 배우러 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다. 그분은 몇 달째 같은 곡만 치시는 것 같지만 항상 즐거워 보인다. 잘치고 못치고는 중요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나도 그저 좋아하는 피아노 소리에 집중하며 즐겁게 피아노를 배우러 온 나 자신만 마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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