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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미 Dec 28. 2023

잘 여물어가고 있는 거겠지.

정신 차리고 보니 올해도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연말이라는 핑계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하나 둘 가지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12월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무언가를 마무리해야 하고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일상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이렇게 일 년이 저물어 간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시간이 야속하게도 더디 흐르는 것 같더니 지금은 가속이라도 붙은 것인지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에게 겁이 날 지경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행동과 말, 생각은 점점 느려지는데 왜 시간은 반대로 흐르는지 모르겠다. 빠르게 가는 만큼 나도 빠르게 움직여야 할 텐데 나는 점점 둔해지고 있다.


12월에 마지막이 얼마 안 남은 만큼 올해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의식적으로 생각해보고 싶다.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을 기억하려면 가끔은 의식적으로 시간 안에서 멈추어야 하는데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로 꽉 차있는 나의 머리는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새로운 것들만 욱여넣고 있는 느낌이다.


12월은 1년의 내가 만들어온 시간들이 응축되어 달고 쓴 모든 맛이 뒤섞인 채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는 때인 것 같다. 변함없는 날들이 계속되어 온 것 같지만 어느새 미묘하게  달라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때에 맞는 경험들을 하면서 그 경험은 나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상처로 남을 수도 있고 영광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몸서리치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알아서 적당히 지울 것은 지우고 새길 것은 새기게 된다. 이것이 아마 아이와는 다른 어른의 시간 관리가 아닐까 싶다.


올해는 나에게 정말 생경한 한 해였다. 변화가 정말 많은 해였다. 아직 그 변화를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는 중이다.


백수가 된 나는 사실 아직도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해하고 있다. 나름의 작은 루틴이 생겼지만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가정했을 때 해보고 싶던 일들을 생각만큼 해나가고 있지는 못하다.


열정이 많이 사라진 탓일까. 무기력함이 계속되어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다음 해를 생각했을 때 이렇게 물음표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늠이 안되고 딱히 특별한 계획도 없다. 물론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은 대부분 지켜지지 못한 채로 매년 세팅되는 일이 일쑤지만 백수가 된 나의 신년 계획은 그 어느 때보다 캄캄하다.


회사를 나오고 이렇게 빨리 사회에서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을지는 몰랐는데 조금 막막해졌다. 목표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죄책감마저 들면서 어정쩡하게 쉬고 있지만 분명 이 시간도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스스로 준 시간이라 합리화를 해보고 안간힘을 쓴다.


단지 새로운 해를 기다리면서 내가 명확하게 세운 목표가 하나 있다면 무엇을 하든 재미있고 싶다는 것이다.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전전긍긍하는 나의 불안이, 나의 고민들이 가져다준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요즘 문득 하루를 무사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 것인지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허망하고 덧 없이 느껴지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자주 멈추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이를 들고 있는 것인지, 예전에는 짧게 스쳐 지나갔던 생각들이 마음에 남아 오래 머무른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우리를 고민하게 하지만 되도록 웃으면서 넘기고 싶다. 조금은 가볍게 터치하고 싶다.


무슨 일이든 재미있게 해보려고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주변 지인들이 있다. 요즘 그들을 깊게 관찰하고 있다. 그들의 말, 생각, 그들이 인생을 가볍게,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의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똑같은 사람인데 인생이라는 무거움 앞에 서 있는 것은 매한가지일 테지만 그들은 그럴수록 더더욱 재미있게 보내야 한다고 한다. 아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조금은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나와는 다른 시선이다.


기질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뇌구조를 가졌지만 내년에는 다른 것 없이 그냥 재미있게 지내보고 싶다는 한 가지 목표 하나만 가져가려고 한다.

 꼭 무엇을 해서 재미있기보다는 조금 덜 심각하게, 가볍게 생각하면서 무엇을 하면 재미있을지를 더 많이 고민해보고 싶다. 일상에서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도 재미를 찾고 싶다. 많이 웃고 싶다. 그리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해야만 해서 하는 일들보다 즐거워서 하는 일들을 찾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마흔이라며 호들갑 떤 지가 어제 같은데 시간 참 우습게 흐르는 것 같다. 흐르는 시간만큼 내가 잘 여물고 있다고 믿고 싶다. 또 예쁘고 탐스럽게 여물기 위해 더 깊어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시간은 영속하지만 시간을 쪼개어 만들어 놓은 시작과 마무리가 인생에서 반복된다는 것이 참 좋은 것 같다.

마무리는 나를 반성하게 하고 시작은 나를 나아가게 한다. 내가 짓는 작은 매듭들이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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