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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Jan 12. 2022

태풍 '나리'와 함께 온 고귀한 선물

태명을 몽돌이라 지었다

2007년 9월 13일 제11호 태풍 ‘나리’가 남해안에 상륙하던 그날은 내가 활동하던 사진 동호회에서 매월 정기 출사를 나가는 날이었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괜찮았기에 나를 포함한 회원들은 예정대로 남해로 갔다.


도착 후에도 일정에 큰 차질은 없었다. 잔뜩 흐리긴 했지만 해오름 예술촌에 다녀와 상주해수욕장에 주차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장비를 챙기고 차에서 내려 인원 점검을 하려는 그 짧은 순간이었다. 불과 10초 전만 해도 구름만 살짝 끼어 있을 뿐 전조현상조차 없었는데 순식간에 퍼붓는 비바람에 남은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미조항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멸치쌈밥에 큰 기대를 하고 한 숟가락 먹으려는 찰나,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최대한 일찍 들어갈게."

당연히 늦지 말라는 얘기일 것 같아 아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습관적으로 먼저 선수를 쳤다.

“어디쯤이야? 비는 안 오고? 운전 조심해서 돌아와요.”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아내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거기에 더해 평소 단 한 번도 쓴 적 없는 존댓말까지 하다니 뭔가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어차피 비바람 때문에 남은 일정과 사진 촬영은 물 건너갔으니 한시라도 빨리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친하게 지내는 몇몇 회원들에게만 인사한 후 서둘러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날아가다시피 집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나를 보고 놀란 아내가 수줍은 얼굴로 뭔가를 내밀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건이라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는데 자그맣게 적힌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임신


말로만 듣던 임신 테스트기였다. 두 줄이 선명하게 찍힌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쁨보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이 더 크게 다가왔고 40kg을 겨우 넘길 정도로 연약한 몸을 가진 아내가 앞으로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 앞섰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다음날 함께 병원을 가보자는 말을 하며 아내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월요일 아침 일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찾아간 병원에선 축하인사와 함께 임신이 맞다고 했다. 난생처음 보는 초음파 사진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점 하나만 보였다. 의사 선생님께선 그게 아기라고 했다. 태명을 몽돌이라 짓고 그날부터 아내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며 혼자 있을 때엔 절대 무리해서 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아내는 임신 기간 내내 놀라운 정신력을 발휘했다. 자고 일어나면 커피부터 마시는 사람이 임신 기간 내에 단 한 잔의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는지 임신 6개월을 넘어갈 무렵 커피가 들어간 유제품 하나를 사서 한 모금 입에 갖다 대고 나머지를 그대로 버린 게 처음이자 끝이었다. 여자는 연약해도 엄마는 강하고 위대하다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런 아내를 위해 나도 최선을 다 해 아내를 보살폈다. 친정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아내이기에 월 1회 정기검진을 갈 때도, 보건소에서 진행하는 예비엄마 프로그램에 갈 때도 항상 동행했다. 그 모든 걸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다. 일의 특성상 밤에 아내를 혼자 둬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럴 땐 야간에 일하는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줄 수 있다는 것에 왠지 특별한 남편이 된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이때였다. 여전히 낮과 밤이 뒤바뀐 야간 근무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가게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고 퇴근을 하면 나를 반기는 두 여자가 있다는 생각에 없던 힘이 생길 정도였다. 천근만근 몸이 무거울 때도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동화책을 읽어줄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임신 중기를 지나 출산일이 다가올 무렵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미스터리로 기억되지만 뱃속의 딸아이는 정확히 아침 10시, 내 퇴근 시간만 되면 육안으로 봐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움직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당장이라도 배를 뚫고 나올 정도로 요동을 쳤고 그때마다 아내는 고통에 몸부림칠 정도였다. 마지막 2개월 정도는 퇴근과 함께 아이를 진정시키는 것이 일이었다. 신기한 것은 내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내 배를 만지며 "몽돌아~ 이러면 엄마가 힘들잖아. 어서 내려가야지."라고 하면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 모든 과정이 내겐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행복이란 게 별 거 있겠나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남에게 손 벌릴 정도로 가난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게 행복이라 함은 가족 모두 건강하고 사는 집에서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는 것, 매 끼니 굶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 딸아이가 이루고 싶은 꿈의 일부라도 이룰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제력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내겐 그 정도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고 그런 소박한 행복마저도 사치였던 것인지 딸아이가 생후 100일이 될 무렵 결코 맞고 싶지 않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봄날의 따뜻한 기운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첫여름을 맞이할 즈음, 우리에겐 시베리아 벌판의 혹독한 추위보다 더한 겨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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