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지갑을 털어 갈, 당신 근처의 마켓
차를 즐겨 마시고는 있지만 사실 많은 찻잔과 티포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참으로 다행히도 '장비병'이나 '세트병'을 앓고 있지는 않은 편이라 소소하게 모으고 있는, 그저 평범한 수준이다. 뭔가를 사고 싶어서 잠이 안 온다거나 새벽에 벌떡 일어나 결제를 하는 케이스는 거의 없는 편.
하지만 차를 마시다 보면 티포트와 찻잔에 눈이 안 가기란 정말 어렵다. 홍차 찻잔에 담긴 차와 종이컵에 담긴 차는 일단 맛부터 차이가 나고 - 향을 워낙 잘 빨아들이는 차의 특성상 종이 냄새가 확 풍긴다 - 입에 닿는 찻잔 가장자리의 느낌, 찻잔의 무게, 소서에 닿는 달그락거리는 느낌까지도 티타임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한 개 두 개씩 모으다 보면 마실 입은 하나 혹은 둘인데 티포트와 찻잔은 몇 배가 된다.
다이소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 컵과 잔이지만,좀 폼나는, 어디서 들어보았다 싶은 브랜드의 잔을 백화점 매장에서 사려고 들면 '무슨 컵 하나가 이렇게나 비싸냐' 싶은 가격대에 경악하게 된다. 본가에 있는 '로얄 알버트'의 찻잔 세트를 달라고 하자 '이건 지금 구할 수도 없는 완전 앤티크다. 안된다.'며 정색하시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달까.
비싼 돈을 들이기는 부담스러운, 그러나 고급스러운 브랜드의 찻잔을 사고는 싶은 초보가 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당근마켓'이다. '당신 근처의 마켓'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유저가 모른다는 것이 특징인 이 중고거래 어플은 코로나 시대의 집 정리 붐을 타고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 성장에 일조한 '당근홀릭' 중 하나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당근마켓에 접속한 당근홀릭'은 황금 배지를 받는데, 이 배지를 받으면 왠지 모르겠지만 다소 부끄럽다.
근처의 동네에서 직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니, 다양한 동네에서 '찻잔'이 검색되는데, 그 중 특정한 동네들에서 오래되고 좋은 제품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역시 부자동네에서 좋은 그릇이
일단, 괜찮은 제품이 떴다 싶으면 무조건 '1. 살게요 2. 가격은 조금 더 드릴 수도 있다'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 처음에 잘 몰랐던 나는 '안녕하세요, 구매하고 싶은데 직거래도 가능할까요, 어디에서 만나시는 게 편하신가요' 등을 타이핑하면서 시간을 잡아 먹었고, 분명 내가 채팅을 걸 때만 해도 조회 수가 5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그리고 채팅은 없었던) 제품이 채팅을 보내고 나니 '채팅 5'로 변해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던 적도 있다.
그리고 내게 돌아온 답은 '팔렸어요' 라는 차가운 단답. 그 이후로 나는 챗을 보낼 때 판매자의 안녕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적어도 굿딜을 살 때는, 용건만 간단히. 선점한 후에 안녕을 물어도 늦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도 그럭저럭 매물로 나오는 브랜드는 앤슬리, 로얄 알버트, 빌레로이앤보흐, 웨지우드, 로얄크라운더비, 로얄코펜하겐, 포트메리온, 르쿠르제, 프랑프랑 등이었다. 물론 동네따라 다르겠지만 역시 인기 있는 브랜드가 중고 매물로도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뭄에 콩나듯 민튼, 로얄 덜튼, 버얼리, 리모주가 나오기도 하지만 헤렌드 (그릇 말고 찻잔) 는 정말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하다.
좋은 찻잔을 파는 딜러들은 보통 그릇이나 커틀러리, 장식장까지도 있는 경우가 많아서 거래를 못 하게 되더라도 계정의 판매 상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름 몇 번의 거래도 해 보고 '이 정도면 좋은 가격, 이 정도는 다른 마켓에서도 구할 수 있는 가격' 정도의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즈음 「 역시 뭐든 잘 알아야 당하지 않는다 」 를 깨닫게 해 준 사건이 있었다. 최근 우롱차에 빠져서 홍차만큼이나 우롱차를 자주 마시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중국식 티웨어인 '개완'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 마련이다.
개완은 중국차를 우릴 때 사용하는 도구로, 손에 쏙 들어오는 그립감과 모자를 쓴 듯한 귀여움이 특징이다. 동양화같은 무늬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글자가 씌어 있기도 하며 민무늬인 경우도 많다. 경덕진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꽤 인기가 많고, 가격도 그리 싼 편은 아니다.
우롱차를 자주 마시게 되면서 개완을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상대적으로 중국 다구에 대해서는 갖고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던 차였다.
게다가 개완을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사용이 어렵다. 손에 쥐고 찻물을 붓다가 뜨거움에 놓쳐 버릴 수도 있고 - 암튼 다소 고통이 따르는 다구이다. 결국 익숙해지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괜히 비싼 걸 샀다가 놓쳐서 깨 먹으면 원통해서 쓰러질 듯 하다.
어느 날 여느때처럼 당근마켓을 찾아보고 있던 중 깨끗한 민무늬의 백자 개완을 발견했다. 단돈 만 원. 이 정도면 개완 사용법을 연습하다가 실수해서 깨도 피눈물이 나지는 않을(물론 아깝겠지만) 가격대다. 얼른 채팅을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 은밀한 곳에서 만나 중고 거래를 성사시키고 물건을 조심스럽게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나도 중국 다구 유저! 룰루랄라, 하면서 깨끗하게 씻어서 선반에 보관해 두었다.
개완도 샀으니 괜찮은 대홍포를 사 볼까, 싶어서 얼마 전 어딘가에서 추천받은 사이트로 들어가 본다. 오, 여기도 동양차 다구를 파네? 괜찮은 게 있을까. 하면서 들어가 봤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개완이 보인다. 어라? 내가 중고로 산 개완이다. (두둥)
아니, 원래 9,500원짜리다! 배송비를 합한다고 해도 12,000원밖에 안 하는 제품.. 아니, 내가 저렴한 개완을 찾을 때는 눈에 띄지 않던 이게 왜 이제야 발견된 거지?!
이 비극적인 소식을 남편 Y에게 전했더니 박장대소하며 '당했네, 당했어!' 라고 킥킥거린다. 중고 제품을 심지어 더 비싸게 사다니 - 역시 사람은 잘 알아야 당하지 않는 법이다. '당근홀릭'이면 뭐 하나, 중고 거래에 쉽게 당하는 것을.
그러나 아직도 '당근!'하는 알림이 뜰 때마다 두근두근, 하면서 재빨리 핸드폰을 켠다. 아깝게 놓쳤던 웨지우드 티팟이나 앤슬리 세트가 다시 뜨기를 오늘도 기대하며 :) 실수에서 배우지 않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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