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_ PM 23:25 일요일. 기록 1시간 전(1/2)
라면 그릇을 설거지하는 동안 아내는 웃으면서 뒤에서 내게 저주를 퍼부었다.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욕이란 욕은 아마 다 들은 것 같았다. 니미럴, 육실할, 개 X 같은 등등… 확실한 것은 그녀가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 듯 보였다. 이때 벨 소리가 울렸다.
‘딩동!’
오늘 아주 손님 복이 터진 모양이었다. 야밤에도 이렇게 누군가가 찾아오다니 말이다. 알고 보니 옆집 남자였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쌓아 뒀던 분노가 폭발했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찾아오는 거요! 싸가지가 없어도 어느 정도 없어야지!”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누나 괜찮은가 해서요….”
“… 누나?”
“싸움 소리가 몇 시간 동안 계속 들려서요. 이웃사촌으로서의 의무로 와 봤어요.”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항상 볼 때마다 같은 후드 티와 무릎 나오는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백수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할 일도 없는지 내가 집을 비웠을 때 집안에 잡일 - 두꺼비집 및 전구 갈이 따위의 - 을 몇 번 도와줬다고 아내에게 들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옆집 사람을 집에 불러들여?”
그때는 핀잔을 건네면서 아주 잠시나마 그와 아내와의 관계를 의심했었지만 말 그대로 잠시뿐이었다. 그는 문틈 사이로 내 뒤에 있는 아내를 힐끔 바라봤다. 아내는 계속해서 정신을 못 차리며 혼잣말을 뱉고 있었다.
“남의 부부 일에 신경 끄고 본인 일이나 잘하쇼! 아, 그리고 다음부터 밤늦은 시간에 이렇게 또 찾아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니깐 그렇게 알아요!”
일부러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잠시 후에 남자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문을 열고 현관에 놓인 통속에 굵은소금 한 주먹을 집어던졌다.
“재수가 없으려니깐….”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집터가 안 좋나? … 잡귀야 물러가라!”
이때 갑자기 더 이상 호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내 마음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자 바닥에 쓰러졌다. 그냥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동안 아내에게 당했던 치욕스러운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음식물 쓰레기를 변기에 버리다 막혔다며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경찰이 출동했던 일, 작년 겨울에 술 먹고 늦게 들어왔다면서 칼바람 속에 빤스와 난닝구만 입고 밖에서 10분 동안 떨게 하다 이웃들에게 망신을 당했던 일 등등….
‘정신 차리자!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그렇다고 이렇게 살 수는 없어. 그래, 상용아! 죽을 때 죽더라도 제대로 된 인생 한 번 살다 죽는 거야!’
나는 있는 힘껏 양손으로 뺨을 때리고 온 정신을 호흡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숨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일 분 정도 호흡을 가다듬자 앞이 보였다. 나는 거의 기다시피 손을 허우적대며 식탁에 있는 휴대폰을 집었다. 긴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을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혼 전문 변호사인 ‘장 변’이었다.
“여보세요? 변호사님, 늦은 밤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 내일 서류 갖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녹음도 해 뒀고 증거도 수집해 놨어요.”
그런데 이때 뭔가가 내 정수리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라면 국물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이 얼어붙었다. 천장에 붙어서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아내와 두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꿈이었으면 했다. 아니었다. 원래 꿈에서 귀신을 보면 길몽이라고 하는데 현실은 180도 달랐다.
“… 여… 보?”
그때까지도 나는 아내와 마주친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아내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내게 달려들어 나를 인정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아니, 줘팼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감정에만 집중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몸을 사로잡았던 공포심은 사라지고 이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만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생존본능 때문인지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아내가 귀신에 들렸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때리는 힘은 일반 여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덩치가 엄청나게 커서 별명이 ‘백곰’인 친구에게 두들겨 맞았던 노스탤지어를 오랜만에 느꼈으니 말이다.
“으악! 살려 주세요!”
떨어뜨린 휴대폰에서 장 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심 장 변이 나의 비명소리를 듣고 경찰이라도 불러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이미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아내에게 빠져나와서 화장실로 몸을 던지고 문을 잠갔다.
‘덜컹, 덜컹!’
“문 열어, 이 개 X 같은 씨X랄 놈아!”
욕조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내의 저주를 퍼붓는 소리가 내 귓속 달팽이관을 때렸다. 화장실 문손잡이가 좌우로 심하게 움직였다. 아내의 힘이 너무 세서 문이 부서지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양손을 깍지 낀 채로 그동안 잘못한 일들을 나열하며 기도를 올렸다.
“부처님, 예수님, 성모 마리아 님, 그리고 하늘에 계신 모든 신들이시여.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앞으로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겠습니다. 약속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