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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신혼록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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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상욱 Mar 17. 2023

신혼록(神魂錄)

09_ AM 00:25 월요일. 기록 시작  

 (* 본격적으로 기록을 결심한 때이다. 참고로 이전까지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에 의존했다면 지금부터는 찰나의 순간에 생기는 느낌에 집중한다.)      


 법사님의 말씀에 따라 아내의 이름과 나이를 얘기하고는 그녀의 사진을 가져왔다. 그는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그림을 옆에 놓더니 내게 전생에 아내에게 지은 죄업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염불하고 108배를 하라고 했다. 여기서의 핵심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그런 거는 최면 걸어서 하는 거 아닌가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원래 관절이 좀 안 좋아서….”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야. ‘너도 나 만나서 참으로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어야만 전생 체험을 시작할 수 있어.”

 내가 염불을 하고 108배를 하는 동안 ‘그것’은 나를 노려보면서 혀를 차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법사님은 죽비 소리로 나의 집중력이 흐트러짐을 경고했다. 

 “사실, 귀신은 무서울 것이 없다. 한이 쌓인 것이 귀신이요. 전생의 업을 이번 생에 못 풀고 죽었으니 말이지. 대부분 그것들은 사람이 가진 마음의 병을 통해 홀려서 들어와. 그렇게 따진다면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이 무서운 것이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108배를 마쳤지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원래 절에서 전생 얘기를 많이 해 준다고 들었다. 대부분 자기가 공주나 왕자라고 얘기한다는데 스님들의 복시를 위한 거짓말이라고 믿지 말라고 했었다. 이때 눈을 번쩍 뜬 법사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네 아내는 왕족의 서녀였어.”

 “왕족의 서녀요? 그럼… 공주였다는 말인가요?”

 “우리나라로 치면 옹주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새벽에 이런 헛소리를 듣기 위해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했다. 결국, 나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4장을 꺼내 법사님께 드리고 그를 내보내려 했다. 그러자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숨기더니 억울한지 애걸복걸하듯 말을 이어 갔다. 

 “원래 남녀가 첫눈에 반하는 경우는 두 가지야. 첫 번째는 전생에 원수이고, 두 번째는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인데 자네들은 후자란 말이지.”

 “알겠어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이만 나가 주세요. 제가 어머니한테는 스님 여기 오신 거 비밀로 할게요.”

 “108배를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 안 그래도 힘든데 더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빨리 나가 주세요.”

 “원수를 위해 기도를 해 주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진다. 그런데…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원수가 아니라는 뜻이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찬 나는 그를 문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법사님은 문고리를 잡으면서 계속해서 버티기 시작했다. 

 “자네는 전생에 귀족의 기사였어!”

 순간 솔깃했지만 앞에 불같이 화를 낸 것이 있어 못 이기는 척 얘기를 들어 봤다. 

 “끝까지 들어 보게!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어. 어느 날,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지. 아내의 아버지는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당신은 공을 세우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게 된 거야. 자네는 아내에게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어. 그런데! 아내는 이 말을 오해해서 자신이 오히려 버림을 받았다 생각한 거야. 결국 자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왔지만 아내는 결혼을 해 버린 후였지.”

 “… 그래서요?”

 “그래서 자네는 배신감에 혼자서 쓸쓸하게 죽게 됐어. 이것을 기억해!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하지 말고 상처나 고통,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이게 나니깐. 그렇게 됨으로써 마음의 병이 치유되지.”

 듣다 보니 괜히 그런가 싶었다. 안 그래도 아내가 항상 하던 불만이 바로 중요한 순간에 자기를 혼자 내버려 뒀다는 말이었다. 나도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쉽게 굉장한 배신감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그 일들은 항상 오해였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어졌었다. 그런데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그것’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아냐? 원수 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의 모든 마음을 다할 정도로 사랑을 받고서는 예상치 못하게 죽어 버려서 전생의 원수를 갚는 경우가 있어. 이것이 전생에서 이어지는 가장 최악의 악연이자 최고의 복수지.”

 말이 끝나자마자 법사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것이었다. 

 “뭘 그리 말이 많나, 상용이 너는 뭐 그걸 다 들어주니? 저 빡빡이 딸이 바로 엄마 귀신이 들렸는데 죽은 여자애야. 아내가 아마 남편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을 했다나?”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법사님의 동공이 마치 ‘그것’의 동공과 마찬가지로 검게 번졌다. 

 “법사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법사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잠시 동안 흐느끼더니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것’은 마치 법사님을 조롱하듯이 흐느끼는 척을 따라 하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장모님한테 연락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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