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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삼 Feb 05. 2023

애도의 방법

이태원 핼러윈 참사 100일에 돌아보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중략)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지난해 출간된 문학평론가 신형철 교수의 책 『인생의 역사』 한 구절입니다. 이 글은 2016년 칼럼을 다듬어서 낸 것이어서 사실 지난해 이태원 핼러윈 참사는 무관한데요. 그래도 참사 직후 이 책을 펼쳐든 제게 이 글은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참사 이후 제 머릿속에 줄곧 떠다니던 '애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중요한 힌트를 줬기 때문입니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가 지난해 쓴 칼럼 <애도의 조건> 도 비슷합니다. 제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습니다. 신형철 교수가 애도의 방법을 '나'의 관점에서 성찰했다면, 김만권 교수는 '사회'의 관점에서 돌아봤습니다. 조금 길지만, 이 글의 일부도 소개해드릴게요.  


  "정확한 사실 규명은 남겨진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첫번째 조건이다. 우리 중 어떤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이 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야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떠나보낼 순 없다. 이를 명확히 모른채 보내야 한다면 살아남은 이들에게 그 죽음은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억울한 희생으로 영원히 남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사실 규명과 함께 필요한 일은 참사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런 책임은 단지 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 재난에는 법적 책임 외에도 정치적·행정적 책임이 뒤따른다. 특히 이태원 참사 같은 경우 현실적으로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해야만 할 국가의 수도 한가운데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국가의 행정 책임자와 관련 지자체장들은 그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다면 참사에서 희생된 이들의 생명은 무책임한 죽음이 되고 만다.


 더하여 재난에 대한 진정한 사회적 애도는, 다시는 그런 참사가 반복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재난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은, 결코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우리에게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긴다. 그 유서를 대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재난을 예방하려는 의지와 실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는 남겨진 사람들의 의지와 실천을 대표해 구현하는 최종적 의무를 진다. (후략)"


 사회적 애도란,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정확히 사실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다시는 같은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재난을 예방하는 행위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입니다. 정리해서 보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요. 하지만 이 당연해보이는 걸 우리가 그동안 잘해왔는지 자문해보면, 글쎄요. 적어도 사회적 애도라는 결과물이 우리에게 당연주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한 사회에서 사회적 참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단지 그 사회가 애도에 실패했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원인과 사실을 규명하는 일, 책임을 지우는 일, 심지어 사고를 방지하는 일마저 고스란히 참사에서 사랑하는 이를 직접 잃은 유족들의 몫이 된다."


 김 교수는 칼럼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사회에서 사회적 참사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유족들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고요. 생각만으로도 가혹한 일인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죠. 슬픔을 추스리기만도 벅찬 유족들이 사고의 원인과 사실을 규명하고, 관련자에게 책임을 지우며, 대책을 도맡고, 심지어 '불행으로 장사한다'는 비판까지 듣는 상황요.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애도의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모두가 살아온 삶과 생각이 다르니 똑같은 모양의 리본만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 저 역시 아직도 답을 찾는 중입니다만, 일상 속에서 잠깐이라도 죽음의 수를 헤아려보고 그 무게를 오롯이 느껴보는 일, 고인들의 삶을 사회적 기억으로 남기고 우리가 배울 것을 서로 이야기하는 일, 남겨진 이들에게 그래도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다시 주는 일, 그래서 언젠가 있을지 모를 나의 불행 역시 이 사회에서 허투루 다뤄지지 않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확신하는 일, 적어도 이런 것들이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100일 전 우리 곁을 떠난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연인을 떠나보내야 했던 모든 분들께도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 참고한 책과 칼럼 : 신형철,『인생의 역사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난다 (2022).

김만권, "애도의 조건", 『경향신문』(2022/12/5)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205030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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