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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May 03. 2016

#20 진실된 사과가 절실한 시대

잘못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이 되고 마는 사과의 태도

요 몇 년 사이 뉴스나 주변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잘못에 대한 사과를 하는 모습이다. 기업이 자신들의 제품의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에게, 언론이 잘못된 기사로 인해 피해받은 독자들에게, 정부가 잘못된 정책이나 권력 남용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개인이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주변 사람에게. 완벽한 사람이나 단체가 어디 있으랴. 잘못은 예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요 몇 년간 누군가의 잘못과 누군가의 사과가 더 큰 이슈가 되는 이유는, 그 잘못의 양이나 질 보다는 사과의 방법과 태도 때문일 것이다. 


일단 잘못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실수에 가까운 것으로 의도치 않았거나 그야말로 실수로 인해 발생한 잘못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잘못을 저지르는 주체가 잘못된 일임을 알고도 그냥 넘어가려다가 일이 터져버린 큰 잘못을 들 수 있겠다. 의도치 않았던 실수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경우, 경미한 수준이라면 진실된 사과를 통해 충분한 이해나 양해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그 실수로 인한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로 인한 피해가 경미하다면 이해가 가능한 것이 일반적인 경우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들은 일단 실수의 경우가 아닌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설령 그것이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더 나아가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고 해도 쉽게 용서받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건강을 해치거나,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힌 큰 잘못이라고 봐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의 사과는 거의 단 한 건도 제대로 된 경우가 없었다. 첫째로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지 않고 최대한 빠져나가려고 애쓰다가 더 이상 빠져나갈 방법이 없자 마지못해 인정하게 된 경우이며, 둘 째는 '사과드립니다'로 끝냈어야 할 사과문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으로 연결되는 진심의 사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수로 인한 잘못이 아닌 의도된 잘못이었음에도 말이다.


내가 '사조영웅전'을 비롯해 김용의 무협지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악당 혹은 주인공의 편에 서지 않은 적의 모습 때문인데, 이들은 주인공과 실력을 겨루다가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지했을 때 스스로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목숨을 내어 놓거나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은 맘이 약한 주인공이 목숨을 끊지 않자 스스로 자결하거나 팔이나 다리를 잘라 무공을 폐하는 경우도 많다. 혹 비겁한 살수를 쓰던 악당이라도 결국 주인공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비겁한 살수를 쓰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역시 무공을 폐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잘못한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잘못을 인지한 순간부터 바쁘게 계산을 해 이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미칠 영향과 밝혀질 확률, 밝혀진 뒤에 받게 될 피해, 그리고 그것이 미칠 파급 효과를 감안하고, 문제가 이슈가 된 이후에도 최대한 다른 방법들을 동원해 잘못의 크기를 축소시키려 하거나, 피해자를 회유하려 들고, 더 나아가 속으로는 '조금 이러다가 말겠지..'하는 심정으로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볼 수 있었다. 진실된 사과는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 기업이나 정부 등 권력이나 부를 가진 가해자의 경우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안타까움이 클 것이고, 더 나아가 '왜 다 그냥 그렇게 사는데 나한테만 뭐라고 하지?'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주변의 모두가 잘못을 하고 산다고 해서 그 잘못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이들의 상처도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하지만 요새의 사과문들을 보면 잘못은 했지만 사실 이건 업계에서는 큰 잘못도 아니고,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난 그나마 나은 편인데.. 하는 식의 핑계가 앞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그렇다 치자. 그렇다고 잘못의 의미가, 피해가 달라질까?


한 때 주변 사람들한테 그런 말을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요새는 워낙 잘못이 빈번히 일어나고 더 큰 문제는 제대로 사과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보니, 사과문 대필이나 사과 커뮤니케이션만 컨설팅하는 일을 해도 적지 않을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다고. 제대로 사과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보니 그렇다.


백번 양보해서, 잘못을 했고 계속 들키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해보자. 하지만 그 잘못이 밝혀진 다음엔 좀 체념을 할 수는 없을까. 예전에는 아무리 나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라도 그 잘못이 밝혀지게 되면 '아, 나는 이제 다 끝났구나..'하며 스스로 체념하는 분위기라도 있었는데, 요새는 잘못을 하고 그 잘못이 만천하에 밝혀져도 체념하기는커녕, 끝까지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 대세 아닌 대세가 되어 버린 것이 안쓰럽다.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의 다음에는 절대 '그렇지만'이 올 수 없다. '그렇지만'을 말하는 순간 그건 사과문이 아니라 그냥 주장이 되어 버리고 만다. 간혹 내 주장을 펼쳐야만 할 사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과의 상황에서는 '그렇지만'이 등장하는 순간 결코 피해자로부터 어떠한 이해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억울한 면이 있더라도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이라면 과감하게 그 억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억울한 측면 하나도 없고, 잃을 것도 없고, 두렵지도 않은 태도로 전하는 사과가 어떻게 진짜 사과가 될 수 있을까.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그런 것일 거다. 그 잘못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잃을 수 밖에는 없고, 억울한 측면도 있고, 질타 등이 두렵기도 하고. 그래도 더 큰 상처와 피해를 입었을 이들에게 무조건 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진짜 사과일 거다. 


진실된 사과가 절실한 시대다. 진짜 사과를 할 자신이 없다면 최대한 잘못이라도 저지르지 말자. 그런 가짜 사과를 할바에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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