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음식 맛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거나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살 경우, 흔히들 집 밥 또는 엄마 밥을 그리워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 속, 혀 끝을 통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는 맛. 집 밥이란 맛도 맛이지만, 추억 한 입이 그리워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최근 엄마 집에서 먹은 엄마 밥은 그때 그 시절의 맛이 아니었다. 반찬 투정을 하는 아들과 딸이 집에 없어서일까? 아니면 음식에 대해 잔소리하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일까? 엄마는 나이가 드니 간을 잘 못 맞추겠다는 얘기를 몇 번 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드니 나가서 장을 보고 집에서 혼자 요리를 차려 먹는 게 힘들고 귀찮다고 하셨다. 매 번 통화로 끼니를 물을 때면, 대충 먹었다 하셨던 이유였다.
깊이 생각해 보니 달라진 것은 엄마의 음식 맛이 아닌 엄마의 시간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에 의하면 엄마는 노년기에 살고 있다. 인간은 영아기→유아기→학령기→청소년기를 지나 장년기→중년기를 거쳐 노년기가 오고 마지막으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의학적인 측면으로 보면 장년기 이후의 육체적 기능은 이미 서서히 하강곡선을 그리는 시기가 된다.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라는 속담을 물리적 시간으로 해석하자면, 건강이 좋지 않은 노년기의 신체적 기능은 보살핌과 도움이 필요한 유아기의 육체 기능과 비슷함 을 뜻한다. 2019년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노환이 오기 전의 노년기는 학령기와 공통점이 많다고 한다. 학령기 어린아이가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생활의 활동반경이 좁은 것처럼 노년기의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에는 보호자의 적절한 관찰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엄마도 육체적으로 많이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내가 무심했을 뿐.
달라진 것은 엄마의 물리적 시간만이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심리적 시간이 존재한다. 심리적 시간에는 기억을 통한 과거, 동시성을 기초로 한 심리적 현재, 그리고 기대에 의한 미래가 존재한다. 엄마가 물리적 시간에 의해 육체적으로 어린아이 같아 짐으로써 심리적 시간에서의 기대(미래)는 의존으로 나타났다. 내 부모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나를 혼내던 엄마의 잔소리는 이제 어린아이의 투덜거림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투덜거리던 시절의 나를 보살펴 줬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의 투덜거림을 받아주고 보살펴 줘야 한다.
물론 인생의 타이밍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잘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엄마 인생의 변곡선과 내 인생의 변곡선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부품처럼 잘 맞물려 배터리가 소진 됐을 때 가솔린으로 엔진을 움직이듯 서로의 인생을 부드럽게 이어서 밀고 당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연스레 바뀌어야 할 역할을 내가 이어받지 못했다. 엄마가 삶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보내왔던 신호를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어른스럽지 못했기에 변화는 매끄럽지 않았다.
표면적인 엄마 음식 맛의 변화에 대해 나는 엄마의 삶의 변화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들 메타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교육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메타인지 대화는 중요하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식하고, 내 생각에 대해 판단하고 규제를 한 채 대화를 해야 한다. 메타인지 대화를 통해 나와 상대방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연결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왜?’ 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하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을 인식했다면, ‘그는 왜 이렇게 말했지? 그녀는 왜 그렇게 행동했지? 왜 엄마의 음식 맛이 변했지?’ 이렇게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을 던진 후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잘못 생각했을 수 도 있으니, 그(그녀)의 말을 들어 봐야지.’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인지 과정이 있어야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할 수 있고, 신중한 생각 공유가 가능하다. 소중한 사람의 진정한 감정과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