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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계 Nov 14. 2024

엄마 생일

엄마가 느꼈을 가치

엄마의 칠순 생일이 다가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엄마 생일이었다. 나는 엄마의 생일을  엄마가 69세가 될 때까지 한 번도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한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용돈을 모아서 동네 상가에 있는 액세서리 매장에서 팔찌를 선물해 드린 게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다. 참으로 못된 자식이다. 이 못된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팔찌를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다. 심지어 사드렸을 때부터 팔찌는 작아서 엄마에게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가 섭섭하지 않게 생일을 잘 챙겨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이모들이랑 외삼촌이랑 다 같이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지만, 당시 코로나 거리두기 4단계가 시행됨에 따라 많은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급하게 계획을 바꿔야 했다. 백화점에 가서 밍크코트를 사드리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가격이 너무 비쌌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생일 전날이 되었다.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너 엄마 생일인 건 아니?”

“알지. 내일 점심 같이 먹자.”

“엄마 칠순인데 잔치는 못해줘도 기억은 해줘야지.”

“알고 있었다니까.”

“그럼 미리 전화해서 언제 보자라고 얘기를 해주던지, 엄마가 꼭 이렇게 먼저 전화하게 만드니!”

“아들이 그렇지 뭐. 알잖아.”

“그걸 알면 이제라도 변해야지!”

엄마가 또 삐졌다. 그리고 나는 역시나 나였다. 내가 참 한심스러웠다. 그래도 심성 고우신 엄마는 내가 맛집 몇 군데 검색해서 카톡으로 보내줬더니 금세 마음이 풀려서 일식집이 좋다며 맛집  찾느라 수고했다고 하셨다.


나의 엄마는 항상 그랬다. 늘 아들에게는 관대하셨다. 구시대적인 엄마는 첫째인 누나가 태어났을 때, 여자 아이라고 속상해서 엄청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인 내가 태어났을 때도 엄청 울었다고 한다. 아들이라고 기뻐서. 학창 시절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사고만 치고, 멋 부리고 다닌다고 불량스럽게 하고 다녀도 늘 내 불순하고 어그러진 생각을 존중해 주셨다. 전형적인 X세대의 표본이었던 나는 학창 시절 힙합 바지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다녔다. 이를 본 삼촌들이 바지 다 잘라버린다고 가위 들고 쫓아올 때도, 내 아들 건들지 말라고 내 편이 되어주었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혼자 귀를 조물조물해서 봉투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명찰 핀으로  귀를 뚫고 온 나에게 염증 생긴다고 과산화수소수를 챙겨 주셨던 그런 엄마다. 


미국 가는 유학비자 받을 때가 정말 모정의 최고치를 보여줬던 것 같다. 유학 가기 전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한  모든 서류 준비를 마쳤다. 유학원에서 내 대학교 1학년 성적표를 보더니 당황해했다. 2학기 성적이 0.0 올 F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지간히 놀았던 것 같다. 유학원에서는 나에게 영사와의 인터뷰 때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군입대 문제로 학교 출석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휴학 신청 시기를 놓쳐서 학점이 0.0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하라고 디렉팅을  해 주었다. 인터뷰에서 나는 시킨 대로 아주 잘했다. 그리고 며칠 후, 영사관으로부터 우편물을 받았다. 영어로 쓰여 있어서 뭐라고 되어 있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Deny라는 단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2년 후에나 다시 비자 신청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학원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엄마는 말 그대로 눈물의 편지를 썼다. 


철없는 아들이지만 엄마로서 아들을 믿는다고. 그래서 20년이 넘는 긴 시간이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엄마로서 신념을 가지고 자식을 믿고 부모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면, 아들도 언젠가는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 갈 것이라고. 그런 계기를 만드는데 영사님께서 기회를 주셨으면 한다고. 이제는 서서히 부모의 품에서 놓아줘야 아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품 안의 자식을 미국이라는 큰 품으로 보내서 넓은 시야와 깊은 생각을 심어주고 싶다고.


엄마는 눈물이 뚝뚝 흘러 얼룩진 편지를 유학원 측에 보냈다. 그리고 편지를 번역해서 영사관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유학원에서는 원본 편지와 번역본 편지 두 장을 같이 영사에게 보냈다. 눈물에 얼룩진 원본 편지는 감성을 자극할 소품이었다. 정확히 일주일 후에 영사관으로부터 서류와 함께 편지가 왔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좋은 엄마를 두었으니, 엄마 실망시키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쓰여 있었다. 유학원에서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라고 엄마에게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당시에는 별일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눈물 젖은 편지 덕분에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엄마에게 나는 눈물만 준 듯하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40년을 넘게 받기만 하면 그건 도둑놈 심보 아니겠는가. 나도 나이가 들면서 주위의 가까웠던 사람들이 멀어지기도, 때론 사라지기도 함을 느낀다. 나보다 근 30년을 더 산 엄마의 인연은 더욱 많은 변화와 소실을 경험했을 것이다. 아빠마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기분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잃어가는 인연들과 야속하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 막연한 기대감으로 기다리는 생일은 외롭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할 수도 없는 나이가 되고, 육체적으로도 나약 해져 가는 부모님을 보며 사랑을 돌려 드려야 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엄마의 공허를 사랑으로 채워 드려야겠다. 나에겐 가장 완벽한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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