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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서평

by 양해연



"나는 백승하를 싫어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와 동성인 여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를 증오한다. p.47"


강민주는 이렇게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영화가 아닌 문장 속에서 이런 식의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캐릭터라니. 강민주 생각의 흐름과 언어가 책을 읽는 내내 독자를 매료시킨다.


92년에 발간된 양귀자 작가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주인공은 27세의 강민주다. 그는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여성문제상담소에서 자원봉사자이자 연구원으로 일한다. 어쩐지 따뜻하고 인간애가 많이 묻어 나올 것 같은 프로필의 젊은 그녀가 당대 최고의 인기 남배우 백승하를 납치했다.


막상 책을 읽으면 '한 여자의 유명배우 납치극'이라는 자극적 소재보다, 글의 화자인 '강민주'가 뱉어주는 언어 한 문장 한문장이 더 파격적이다. 최근 양귀자 작가의 다른 책 『모순』이 역주행이자 꾸준한 베스트셀러로 달리고 있는데, 고등학생 때 (교과서로) 읽은 『원미동 사람들』 이후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처음 읽어버린 나는, 좀처럼 작가의 유명작품에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 강민주의 생각과 언어에 굉장한 대리만족을 느낀 나머지, 혹시 이 소설과는 결이 다를 수 있는 다른 글로 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아서다.


주인공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아무래도 강민주라는 사람의 일터가 여성상담소인 만큼, 90년대에 만연했을 가정 내 여성폭력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 내담자들을 대하는 강민주의 솔직한 태도가 무엇보다 돋보인다.


"p.71 희생이라니, 고통의 인내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주장은 기득권을 쥔 자들의 염치없는 요구일 뿐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수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런데 2000년 하고도 25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의 여성폭력은 좀 나아졌을까.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사회나 가정에서 딸과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인권 중 여성에 대한 측면이 제고되었겠다. 그만큼 여성폭력에 대한 수치도 줄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토록 강민주의 언어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 사회, 내 가정에서 존재하는 어떤 억압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나조차 모르는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것들이 억압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p.72 억압에 대해서 말하라면 세상의 반절인 여자들이 당한 수난을 들지 않을 수 없다. ’


문장을 읽는 내내 독백은 독백대로, 숨이 막히는 대화와 일의 전개는 전개대로 낮이고 밤이고 숨 가쁘게 흘러간다. 강민주와 백승하의 대화에서 보이는 강민주의 언어도 인상적이다.


p.217. "(중략)나는 억압받는 자들 쪽에 서 있어요. 진실을 향한 끝없는 모색과 투쟁이 결국은 이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려는 노력인 것은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



허나 일부 독자 중에는 결말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워낙 화자의 말과 생각이 온갖 사이다와 소화제는 다 때려 박은 듯한 시원함인데, 정작 결말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다. 허나 어쩌면 그 아쉬움이 작가가 '이 사회의 한계와 그에 따른 답답함과 무력감'을 시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을 다 읽은 나는 한동안 이 책만큼 강렬한 느낌의 책을 찾지 못해, 여전히 책이 주는 여운과 한동안의 강렬함에 빠져있다. 그리고 결말만큼 나도 모르겠고, 답답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30대 여성, 엄마의 위치가 가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금지 받고 있진 않은지', 혹은 자발적으로 금지하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한 것이었던 것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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