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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ug 31. 2023

달과 비둘기와 바람

육아 중 생각


불 듯 말 듯 스치고 지나가는 슨슨한 바람. 그래서 더 좋은 반가운 찬기. 가을이 오면 보통 좋기 전에 아쉬워했던 나였다. 시원함 보다는 이번 해도 지는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저 좋기만 한 가을 찬기라니. 지긋지긋하다 못해 지독하던 여름이었다. 아이는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를 몇 번이고 앓는 중이었다. 아마 개가 안 걸리니 사람이 걸리는 게 분명했다.      


며칠 전부터 한밤 중에도 울부짖는 매미의 소리는 사라지고, 풀벌레 소리가 자연스러워진 그 밤. 눈과 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질쎄라 잠을 부르는데 나는 도저히 그렇게 잘 수가 없었다. 졸린 눈을 달래고 무거운 몸을 이끌어 베란다 의자에 앉았다. 인테리어 소재로 핫한 홈카페라면 더 좋겠지만, 보이는 배경이라고는 아이 물놀이 해주고 말려놓은 튜브장과, 잘 쓰지도 않는 마대자루가 끝인 이 베란다에 밤이 찾아왔고, 내가 왔다. 거기에 날 위해 놓인 캠핑의자에 발 뻗고 눕듯이 앉으면 집안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편안과 자유가 찾아왔다.     


바로 그때, 달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달.

분명 거실에서도, 베란다에서 일어난 자세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달이. 앉으니 비로소 보였다. 마치 내가 여기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비로소 편안하기를 누구보다 기다렸다는 듯이.

달이 밝게 비추는 밤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혹은 편안해도 될 것 같다. 옛날 동화나 사극에서 아낙네들이 달을 향해 물 떠놓고 기도하던 그 마음이, 무엇인 줄을 이제야 알 것도 같았다.


뜨는 태양도 좋지만, 지는 태양과, 밤의 달에는 영을 위로하는 듯한 기운이 있다. 말도, 표정도, 하물며 보이는 형상과 색이 화려한 것도 아닌데 구름이 끼면 낀 대로 개면 갠대로 흐릿하거나 영롱하거나 그 자체로 영엄하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엄마니까 고됨이 당연한 그런 나날들이었지만, 그래서 더 무언가를 홀로 하고 싶어 잠도 마다하고 집안을 배회했다. 대놓고 비추는 달이 아닌, 숨은 달을 발견했으니, 왠지 더 특별하게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알아주길 바라며 하는 행동은 추오도 없었지만, 우연히 누군가 알아주면 솔직히 좋은 어린 마음같이. 오늘은 달이 나를 반기고 마른 목을 비로소 축여주는 날이었다. 아이의 감기수발에 의연하게 대처한 줄 알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던 나는 지쳐있었고, 밤하늘 달만 보고 안온을 누렸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던 감기는 시작이 미약했을 뿐, 아주 지독한 감기로 아이와 나를 괴롭혔고, 그것도 회복세가 되나 싶었을 꼬박 일주일차 즘에 고열이 시작되었다. 아이 옆에 있는 게 나의 몫이지만, 어쩐지 나는 밖이 너무 그리운 엄마였다. 이런 날은 늘 그렇듯, 분리수거라도 할 핑계를 챙겨 나와야 했다. 나와 달리 집돌이인 아이는 같이 나가지 않는다니, 나는 홀로 재활용더미를 이고 지고 주섬주섬 집 앞을 나오는데 1층 복도부터 퍼지는 바깥의 공기가 발 끝부터 나를 휘감고 올라왔다. 심지어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비를 맞으며 쓰레기를 정리하다 들어가는데도 축축하고 불쾌하기는커녕 상쾌하고 시원하고 심지어 자유로웠다. 우산도 안 쓰고 동네를 걸어 들어가는 나를 누가 볼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바깥공기를 온몸으로 맡고 싶었다. 내 몸은 온 모공이 밖의 공기를 맡을 준비가 돼 있었다. 나왔던 입구를 삥 돌아 다른 입구를 통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길에는 작은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흙과 빗물이 조금 고여있는 그곳에 비둘기 몇 마리가 나처럼 비를 맞으며 배회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비를 맞을지언정 지금 발길 닿는 대로 배회할 수 있는 비둘기들 부러워했다.

비둘기가 부러운 날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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