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성관계에 있어 결론만 원하고, 여자는 그 전에 애무, 내러티브 등 단계적 접촉과 정서적인 연결이 우선이라는 공식은 당연하지만 성차가 아닌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는 그랬다. 남편은 나에게 기승전결 없이 결만 원한다고 타박하곤 했고, 나는 시간도 에너지도 없을 땐 그게 효율적(?)이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선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같이 사는 부부여도 서로를 계속 궁금해하고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부부관계 강의를 준비하면서 본 연구결과를 통해서 더 확신하게 되었다. 부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의 마음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는데 1,2년 함께 산 신혼 부부는 비교적 정확도가 높은 반면, 부부가 같이 산 지 3년이 넘어가면서부터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한 마디로, 서로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더 이상 알아가려는 노력 없이 지내면서 상대방의 마음, 상태, 의도에 대해 헛다리짚는 부부가 많다는 뜻이다. 하긴, 나도 나를 아직 잘 모르는데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나 아닌 배우자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큰 착각인가.
남편도 분명 나 못지 않게 피곤할텐데 사랑의 언어 1위가 스킨십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얼마 전부터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자신만 나를 원하고 나는 먼저 원하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것 자체가 속상했나보다. 내가 ‘서운함’이라고 해석한 것일뿐, 다수의 (경상도) 남자가 그렇듯 서운한 마음을 서운함으로 표현하지 않고 거의 화가 담긴 컴플레인의 형태로 툴툴거리는 남편을 보며 나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나 요즘 왜 이렇게 별로 생각이 없지? 일하고 육아하고 집안일하고 피곤해서 스킨십이고 뭐고 뭘 할 생각 자체가 없는 것도 맞는데... 그럼 남편이 뭘 어떻게 해주면 좀 마음이 동할까?
그저 피곤하다는 이유만 들이대기엔 남편도 마찬가지일뿐더러 어쨌든 부부고 남편이 서운해하는데 이유라도 생각해봐야 더 나아질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이렇게 무심코 던진 질문에 좀 놀라운 답이 떠올랐다. 바로 ‘다정하고 예쁜 말을 들으면 좀 힘나고 마음이 생길 것 같다.’는 거였다. 마침 둘 다 안방에 들어서기 직전에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내가 아이들에게 어떤 좋은 말을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남편 왈 ”자긴 정말 입은 살아있네요!“ 했다. 물론 우스개소리였고 나도 그 순간에는 같이 웃고 넘어갔다. 뭐 내심 감탄하는 마음이 있었겠지 하고선. 근데 만약 그 때 남편이 ”와.. 어쩜 그렇게 좋은 말을 해줬어요? 자긴 정말 지혜롭네요!“ 라고 답했다면? 육퇴하고 속절 없이 지친 몸과 마음에 힘이 솟을뿐더러 그 힘이 남편을 향한 솟구치는 애정으로 향했을 게 분명했다. 이 질문을 건네기 전까지 나는 내가 그런 말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지, 그 말을 듣는다는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전혀 몰랐다. 나도 너무 지치고 힘든 상태가 되면 정서적인 연결이 먼저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바로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자기가 다정하고 예쁜 말을 해 주면 그 자리에서 자기를 덮치고 싶어질 것 같아요! 아까 그 상황에서 만약 자기가 이렇게 말했다면 나는 분명 뭐든 하고 싶어졌을 거예요.“
남편은 대체 그게 무슨 핑계냐는 듯 어이 없어하며 말했다.
”그건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마치 내가 스킨십을 빌미로 원하는 걸 받아내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담아 한번 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 자기한테 나 유혹하는 법을 알려주는거예요.“
남편 입장에선 어쩌면 빈정이 더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섹스를 빌미로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받아들였다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깨닫게 된 걸 남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몰랐던 날 유혹하는 법에 대해서, 날 다루는 매뉴얼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다. 그걸 주고 말고는 남편의 선택이지만 나라도 그걸 잘 새겨두고 싶었다. 매일 몸과 마음이 지쳐서 끝나는 하루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법에 대해서. 그걸 남편이 하면 날 꼬실 수 있는거지만 나도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거니까.
사실 그렇게 웃으며 말해놓고 나는 잠든 남편을 옆에 두고 혼자 조금 울다 잤다. 그냥...처음에는 나도 몰랐던 내 목마른 마음이 좀 서글펐다. 이제는 좀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나 여전히 대놓고 다정하고 예쁘고 칭찬해주는 말 무척 좋아하고 원하는구나. 그게 충분히 오지 않는게 당연해졌다고 해서 없어도 괜찮은건 아니었구나 싶어서. 그렇게 조금 훌쩍이며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니 신기하게도 남편이 나에게 건넨 그만의 애정표현들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와 음식들을 일하면서도 생각해서 사오고, 애들을 재운 후에도 바로 안방에 들어가지 않고 내 방에서 일하는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들어주고, 오래 가는 내 기침을 걱정해주는 말을 건넨 그의 애정표현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받지 못해 마냥 지친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아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그런 순간들이.
이제는 나와 남편을 위한 에너지를 좀 남겨놔야겠다. 그래서 그 중 일부는 하루종일 이래저래 고군분투한 나에게 먼저 원하는 말들을 진심 담아 잔뜩 건네는 데 쓰고, 그걸로 얻은 힘과 애정을 남편에게 먼저 나눠줘야지. 남편에게 날 유혹하는 매뉴얼도 알려줘야겠지만 남편을 유혹하는 데에도 힘을 써야겠다. 뒷이야기지만 남편이 당시에는 빈정 상했어도 들었으니 내심 의식하긴 한 것 같다. 그 뒤로 내게 하는 표현들을 보면ㅋㅋㅋ 사실 나도 원하는 것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돌려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내가 좋았다. 앞으로도 내 매뉴얼을 열심히 탐구해나가야지. 나도 나와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안다고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계속 더 궁금해하고 알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