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있으면 되는데 왜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육아말고 뭐라도 하려는 엄마의 몸부림

by AskerJ



지금 내 카톡 프로필 뮤직 첫번째 곡은 바로 장기하의 '가만있으면 되는데 왜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다. 거의 세뇌수준으로 같은 말만 내내 반복하는 이 노래가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보면 이 말을 건네고플 정도로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병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을 하려고 했고 실제로 몇 개월 동안 일을 해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처절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면 그 시간 동안에는 나도 남편도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을거라는 초보 엄마아빠의 대단한 착각이 불러일으킨 실패였다.

우선 돌이 될 때까지 어디 크게 아픈 적 없었던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보란듯이 아프기 시작했고, 거기에 코로나 상황까지 더해져 지침에 따라 아이들이 콧물, 기침, 열이 있으면 바로 귀가조치를 해야만 했다. 기껏 출근을 하고나서도 양해를 구해야 하는 날들이 생겼고, 당연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으며 남편도 같이 연차를 쓰면서 버티려해봤지만 둘 다 스트레스가 심해 날이 서 있는 날들 속에서 이렇게까지 일을 하는게 맞나 하는 회의감으로 결국 도망치듯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대표님과 일을 하던거라 모르는 사람과 일하다 끝난 것보다 더 타격이 컸다.

K-장녀로서 책임감이 과하면 과했지 덜하진 않았는데 정신 없는 상황이라해도 자꾸 일에서 실수를 하고 사고를 치는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일들은 할 수 있는 한 수습한 뒤에 마무리 짓긴 했지만 재택을 하다 출근을 시작한지 한 달도 안되어 일을 그만둔 것 자체가 참 무책임하다 느껴져 일을 그만두고도 한동안은 거의 트라우마 수준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 쓰라린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사회인으로서 일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급할 때 아이들을 맡아줄 수 있는 응급인력이 없는 한 나는 풀타임을 할 수 없다. 파트타임 역시 아이들이 아프면 일을 하기 어려워지니 고정적으로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은 할 수가 없다. 이렇게저렇게 냉정히 따지고 나니 내가 고정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은 아이들을 다 재우고 난 뒤인 10시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 시간에라도 일할 수 있다는게 감사하기도 했지만 사실 육아전쟁이 끝나고 겨우 애들을 재우고 난 뒤에는 너무 피곤하다는게 문제였다.




내가 하는 심리상담일은 내 컨디션과 마음상태도 영향을 많이 미치다보니 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1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안정성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환경적 제약과 불안정한 마음상태가 되니 그 안정성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원하는 시간에 안정적으로 하기 힘든 환경과 소진된 상태로 인해서 나는 조금씩 무기력해졌다. 결과적으로 현재 내 컨디션으로 소화 가능한 상담사례 2~3개만 남겨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는데, 문제는 내가 이 정도 일만 하고 나머지 시간엔 가만히 있는 걸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항상 뭔가를 하려 하고, 뭐든 새롭게 시작하고 시도하는게 취미인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멈춰있으려 하니 낯설고 어려웠던 것이다. 정말 원하면 단기적으로라도 일을 할 수는 있었으나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 쉬고 싶었다. 쉬고 싶으면서도 생산성 있는 일을 하면서 유능감을 느끼고 싶어하니 누가 들으면 '도대체 어쩌라는거냐'고 대꾸할만한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은 일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내가 잘하고 싶어하고 좋아하는 일이면서도 하고 나면 뭐라도 남는 그런 일로 딱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마치 일처럼 어떤 성과를 내야할 것 같고, 하면할수록 내 안에는 쥐어짜도 그럴싸한 창의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게 또 문제가 됐다. 여기가 바로 장기하씨의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왜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가 나올 타이밍이다. 답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가만히 있는게 필요한 것 상태와 가만히 있기 어려워하는 나란 사람 사이에서 나는 결정했다.

-쉬는 것도 하나의 일이자 계획으로 쳐줄 것.
-아무것도 안하는 것 또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라는 걸 알아줄 것.
-내내 가만히 있는 건 어렵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할 것.
-뭔가를 '생산하는 것'과 '유능감'에 집착하지 말 것.
-내가 아무리 내 자유시간을 게으르게 보내도 나머지 시간에 아이들을 놀아주고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것만으로 이미 하루만큼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에 기여한 것이고 그렇게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잘해낸 거라는 걸 의식적으로 인정해줄 것.

나는 여전히 뭘 자꾸만 하려는 사람이다. 위 결정들 또한 뭘 하려는 거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면서 나아가는 걸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것 또한 인정해줄 것이다. 장기하씨, 덕분에 나는 '가만히 있는 것'도 하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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