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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kerJ Jun 10. 2022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전남친을 만났다

*이미지출처 : © nate_dumlao, Unsplash


그가 그 결혼식에 초대받았다는 걸 나는 미리 알고 있었다. 신부인 언니가 내게 미리 양해를 구하며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나도 사실 양해를 구하기에는 그와의 연애가 꽤 지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의 내 남편을 소개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미리 말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살면서 시간상으로는 꽤 지난 일이지만 체감상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일들이 있다. 그와의 연애가 나에게는 그랬다. 꼭 성인이 되어서 한 첫 연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연애였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고, 내가 먼저 고백했기 때문에 연애하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더 많이 좋아한다고 느낀 연애였고 결국 그가 먼저 끝낸 연애였다. 그 뒤로도 한 번의 연애가 더 끝나고 나서야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많이 좋아한 시간들이 꽤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이별의 말을 들을 때는 뒤통수로 차가운 파도가 쏴아 하고 밀어닥치는 느낌이 든다는 걸 알려준 것도 그였다. 헤어지고도 마음 잘 접지 못해 방황하는 나를 한번 만나주었을 때 쌩뚱맞은 염색에 뽀글 파마까지 해서 완전히 다른, 내 스타일이 아닌 몰골로 나타나 뜻밖에도 마음이 확 접히게 해주기도 했다(그럴 의도로 한 머리는 아니었겠지만).

 

그랬던 그를 구의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나는 기혼이고 그는 미혼인 채로 만난다는 것도 어쩐지 묘했다. 게다가 신부인 언니가 남편의 친구이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는 결혼식이었다. 어떤 표정으로 마주하게 될까. 능글맞은 사람이었으니 특유의 여유로 나를 대하려나. 그럼 나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그뿐만이 아니라 나조차도 내 마음과 반응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결혼식 당일이 되니 내 결혼식도 아닌데 조금 긴장이 되었고 뭘 입고 갈지는 조금 더 고민을 했다. 생각보다 그는 금방 마주치게 되었다. 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신부 언니에게 인사를 하러 올라갔다 나오는 길목에 그가 친구와 서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분명 본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린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죄라도 진 사람처럼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걸 피하려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우습기도 해서 그 옆을 지나가며 "뭘 그렇게 민망해해?"라고 한 마디를 던졌다.


결혼식에서 친구들 사진을 찍을 때, 사람이 많아 둘로 나누어 찍는데 나는 나가서 사진을 찍기 위해 서 있고 그는 앉아있었다. 우리가 서로 꽤 거리를 둔 채로 있으니 그제서야 그가 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멀어서 어떤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꽤 시선을 두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좀 인사할 준비가 되었나 싶어 사진을 찍고 나서 그에게 다가가 "아니 사람을 보고 왜 인사를 못해?" 하니 다시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심한 동공 지진을 보여주었다. 그가 당황스러워할수록 어쩐지 나는 더욱 여유로워져 나중에 지켜본 친구가 말하길 사귄 사이가 아니라 거의 친누나가 다그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명색이 전여친인데 조금 덜 몰아붙일걸 그랬나.


남편은 돌아오는 길에 왜 전남친한테 자기를 소개해주지 않았냐고 했다. 나조차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남편을 소개해줄 수 있을까. 그와 결혼식장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른 친구는 내게 그의 파혼 소식을 전해주었다. 너가 위너라고. 먼저 결혼한 것이 과연 위너인지를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파혼 소식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마냥 통쾌한 것도 안쓰러운 것도 아닌 어떤 기분. 사실 그날 내가 궁금했던 건 그의 근황보다 나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이었다. 피차 우리 연애 뒤에도 각자 연애 열심히 하며 잘 살고 있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도 우리의 연애가 체감상 그리 멀지 않은 일이었던 걸까. 분명한 건 그가 나를 능글맞고 여유 있게 대했다면 내 기분이 이렇게 묘하게 좋았을 리는 없다는 거다. 내가 먼저 결혼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보다 여유 있었기에 위너였다. 나는 그와의 연애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사람으로, 그는 어딘가 독립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난 것 같았다. 사실 어떤지 알 길은 없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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