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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의 무한책임 Mar 02. 2022

[한줄책방] 그 시간조차 '나'였음을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지나고 보니 촉 떨어진 전구알 같던 열정들

     

1. 위 구절은 이 단편집 중 소개된 단편소설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다들 그런 때가 한 번쯤은 있었을까?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그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서 내 몸의 모든 신경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기억.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촉 떨어진 전구알처럼 그것이 아무 쓸모도 없는 허접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던 순간. 그때 몰려오던 후회와 회환을.    

  

사회인 초창기 시절이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고, 다시 회사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아침이 밝기만을 기다리며 술이 깨기를 기다렸던 어느 이른 새벽, 바닥에 나뒹구는 수많은 전단지와 명함을 보았다. 새벽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한 젊은이도 보았다. 그 순간 내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지던지. 내가 밤을 새우며 느꼈던, 내 것이라 여겼던 즐거움과 쾌락과 열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싶었다. 다 거짓말 같았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후에도 나는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여러 번 반복했다. 때로는 인생을 뒤흔들 만큼 어처구니없는 것에 열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것이 헛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역시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크든 작든. 그것도 내 시간의 일부였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가다가, 이제 좀 걷는 법을 알겠다 싶을 때 피니쉬 라인 아닐까.      


고통을 대면하는 법      


2. 지난주에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고 난 뒤, 그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하루키의 소설 <여자 없는 남자>가 읽고 싶어졌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를 비롯해 ‘드라이브 마이 카’ ‘독립기관’ ‘사랑하는 잠자에게’ 등 단편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영화는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고 ‘셰에라자드’ ‘기노’ 등을 함께 버무려놓은 작품이었다. 여기에 체홉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절묘하게 풀어놓았다. 그리하여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다.  

    

이 7편의 소설은 각각 다른 소설이지만 맥이 통한다. ‘여자’, 자신의 한 시기, 한 시절을 상실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하루키 소설의 가장 큰 정서인 (적어도 내 생각에는) 상실이 작품 골고루 깔려있다. 상실하고서도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 슬픔을 꾹꾹 눌러 감추고만 사람들.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고 힘들어해야 한다. 힘들다고 소리치고, 고통에 몸부림도 쳐봐야 한다. 그래야 그 슬픔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대면하지 못하고, 나만의 공간(소설 속에서는 ‘내 차’)으로 숨어버리듯,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드라이브 마이 카>― 책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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