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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의 무한책임 Mar 04. 2022

[한줄책방]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온다, 맥락 없이

안똔 체홉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머리가 희끗해질 때 사랑이 빠진다는 건      


1.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나이에 참 사랑을 알게 됐다. 이것은 삶의 축복일까, 아니면 슬픔일까. 어쩌면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대관절, 사랑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나이 들어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다. 이미 삶의 비밀을 한 조각 엿보았기 때문에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죽든지, 살든지, 괴로워하든지, 썩든지, 환희하든.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2. 안똔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아주 짧은 소설이지만, 다 읽고 나면 뒤통수로 한 대를 맞은 기분이 든다. 이건 뭐지? 밑도 끝도 없이 사랑에 빠진다. 유부남 유부녀가. 맥락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다. 하긴 어디 맥락 없고 인과관계없는 게 사랑뿐일까. 우리 삶에서도 그런 부조리함은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뒤흔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딱히 이렇다 할 스토리라는 게 없는 이 소설은 소도시에 사는 ‘구로프’라는 한 남자가 그 지역에 휴양 온 스피츠를 데리고 다니는 한 젊은 여성 (안나 세르게예브나)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만지만, 그녀가 떠난 뒤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며 그녀를 찾아가 인생의 참사랑을 만났다고 고백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인 것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이제 두 사람은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됐고, 또 다른 인생을 맞을 준비를 하게 됐다. 체홉은 딱 그 부분에서 소설을 마무리한다.      


밀회를 즐기면서 적당히 만날 것인가, 각자에게 가정이 있으니 체념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 사랑에 뛰어들 것인가.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에 맡겨놓은 듯하다. 무엇이 됐든 두 사람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으로 나오는 이 구로프라는 남자는 (소설 속에서는 상당히 시시하고 시시껄렁한 인물로 묘사) 어째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안나에게 사랑에 빠졌을까. 그것은 아마 그녀의 진심을 느끼게 되었고 서로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가 다시 자기 삶터로 돌아간 뒤에야 자신이 그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저 단순한 열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녀와 함께 잠시 떠난 휴양지 오레안다라는 곳에서 그는 진정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인생과 삶이 달리 보였으니까.      


‘오레안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교회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새벽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얄따가 보이고 산 정상에는 흰 구름이 걸려있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매미들이 울고 있었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공허한 바닷소리가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영원한 잠, 평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래에서는 바닷소리가, 이곳에 아직 얄따도 오레안다도 없었던 때에도 울렸고, 지금도 울리고 있고, 우리가 없어진 후에도 똑같이 무심하고 공허하게 울릴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변화 없음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에 우리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지상의 끊임없는 삶의 움직임에 관한, 완성을 향한 부단한 움직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구로프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구로프가 삶의 유한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거대한 시간과 자연 앞에서는. 하지만 사랑할 수 있기에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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