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가 있다
태국 방콕까지 약 12000km를 달렸다. 태국까지의 여정 동안 채워진 내적 충만감은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만족 그 자체였다. 다만 지금 이 여행을 유지하기 위해 당장의 돈 문제는 여행의 지속 여부를 어렵게 하고 있었고 그 염려로 인해 내적 에너지는 조금씩 고갈되고 있었다. 여행 중 고단한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며 넘어왔건만 돈 문제 해결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동남아로 오면서 은행 잔고가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출이 적은 여행을 추구하면서 지향하는 여행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고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원래의 목표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돈으로 인해 답답함이 느껴졌음에도 스스로 돈에서 초탈한 여행자라 괜찮다고 다독였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변하고 있음을 알고도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거다. 베트남까지 와서 한국돈 백 원, 이백 원 갖고 매 상황마다 실랑이하는 건 절약이라기보다 비루한 일이었다.
앞으로 이 여행을 더 이상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생각만 가득했을 때 우연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같이 여행한 프랑스 친구를 방콕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보지 않겠느냐며 제안했다. 생각만 하던 마지막 옵션이 그 친구의 입을 통해 나왔다. 사실 여행 중 혹시나 돈이 다 떨어지면 그 방법을 써 볼까 생각했지만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호주가 내키지 않아서였다. 다녀온 많은 지인들로부터 안 좋은 경험을 듣기도 했거니와 현지인 포함 주변인들과도 잦은 말썽이 생긴다는 친구 말이 주요한 이유였다. 나 역시 괜히 가서 안 좋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국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한 뒤 자전거와 장비를 구입할 돈도 여행을 지속할 자금도 부족했다. 내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 가든지 돈 벌러 호주로 가든지 당장 선택을 해야 했다. 난 정말 겁이 났다. 단단히 벼르고 선택한 이 여행이 여기서 끝날까 봐.
처음 자전거 세계여행을 선택할 때처럼 호주로 가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다시 이 문제를 살펴보니 한층 더 깊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선택의 순간으로 보였다. 한편 만약 여행이 태국에서 끝나게 되면 지금까지 라이딩한 시간을 젊은 날의 고생으로 포장한 뒤 그것을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윤색하는 내가 너무 빤히 보여서 한심스러움과 짜증이 났다. 그 감정이 이 여행을 시작할 때처럼 다시 한번 용기를 내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내게 이 세계여행은 수년 동안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 살면서 해 본 가장 큰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여행이 멈추고 다시 시작한다면 난 절대로 처음의 다짐과 같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한 번이 어렵지 그 뒤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는 쉬우니까. 그만두고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그때의 내 마음과 각오는 지금과 절대 같지 않을 테니까.
여행을 중단할 위기에서도 난 호주가 내키지 않았기에 막다른 상황 속에서도 호주로 가지 않기 위한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호주행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 다시 엄습했고 한편으론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래. 내가 날 위해 살아야 해. 누구도 날 위해 살아주지 않는다. 내가 내게 좋은 것을 줘야 해.'
당연히 쉽고도 좋은 대안은 없었다. 다행이라면 남아있는 호주행은 어렵지만 썩 괜찮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여러 수단을 찾아봤지만 결국 남은 옵션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뺑소니 사고는 긴 고민을 낳았고 마침내 호주행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방콕에서 신체검사를 마친 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 달리 말하자면 이 여행을 계속하기 위한 가능성에 베팅했다. 마음속 목표는 ‘돈 바짝 벌어서 원하는 여행을 계속하고, 안되거나 망하면 그땐 별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야지.’였다. 사고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의 도움으로 쓸만한 자전거와 장비, 저렴한 노트북 하나를 마련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까지 달려 호주행을 남겨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