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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다스·카산드라·시빌레, 신화 속 소원의 역설

by 야담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신이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좀처럼 긍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미다스, 카산드라, 그리고 시빌레. 이들은 각기 다른 욕망을 품고 신에게 소원을 말했고, 신은 이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 되지는 않았다. 왜 신은 소원을 들어주면서도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가? 그리고 소원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고대 신화 속 사례들과 이를 모티프로 한 문학작품을 함께 살펴보며 신이 들어준 소원의 본질을 탐색한다.




신화 이야기




당나귀 귀 미다스 왕


디오니소스의 스승인 살레노스가 실종되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미다스는 자신의 궁전에 있는 살레노스를 따뜻하게 맞아 환대한 파티를 벌인 다음 디오니소스에게 보내주었다. 이것이 고마웠던 그는 미다스 왕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한다. 미다스 왕은 자신이 손대는 것은 모조리 황금으로 만들어달라고 했고 디오니소스는 그대로 들어준다. 그러나 그는 음식이나 물까지 황금으로 변하게 되어 이내 후회를 하며 디오니소스에게 기도한다.



디오니소스는 팍톨로스 강의 원천에 가서 머리와 몸을 담그고 죄를 씻으라고 했고, 미다스 왕은 그대로 하여 저주에서 풀려난다. 이후 그는 트몰로스 산신의 심판 아래 아폴론과 음악 경연 대회를 하는데 그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항의하는 그를 트몰로스 산신이 당나귀 귀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모자로 귀를 가리고 다녔고 그의 이발사만 비밀을 알고 있었는데 이를 갈대밭에 가서 외치는 바람에 세상에 당나귀 귀 미다스 왕이 알려졌다.



설득력을 빼앗긴 희대의 예언자 카산드라


트로이아의 공주 카산드라는 예언의 신 아폴론이 사랑하여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더니 그녀는 예언하는 능력을 원했고 이를 들어주었다. 능력은 받되 아폴론이 원하는 사랑은 받지 않았다. 화가 난 아폴론은 그녀에게서 설득력을 빼앗아버렸다. 그 결과 정확한 예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이후 트로이아 전쟁이 끝나고 아가멤논의 연인이 되어 미케나이로 돌아온 뒤 그의 아내에게 피살되었다.



피티아 시빌레


아폴론은 시빌레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에게 소원을 물었다. 시빌레는 손에 들고 있던 모래알 수만큼 오래 살게 해달라고 했고 아폴론은 그것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시빌레는 청춘을 달라는 말을 빠뜨렸고 아폴론에게 이것을 더 말하지 않은 채 그녀는 점점 늙어가면서도 죽지 못한 채 수천 년을 살아가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육체는 작아져 결국 병에 갇힌 목소리만 남았고 사람들은 병 속에서 '나는 죽고 싶다'는 시빌레의 말만 듣게 되었다.




신화와 문학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지식 욕망이 어떻게 초월적 계약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원 문학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익혔음에도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어 욕망을 실현하는 대가로 영혼을 건다. 그는 젊음을 얻고, 사랑을 얻고, 쾌락을 경험하지만, 그 대가로 주변 사람들의 삶은 파괴되고, 결국 자신의 내면마저 황폐해진다. 『파우스트』는 인간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소원을 말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파멸로 되돌아오는지를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오스카 와일드의『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 남자의 비극을 그린다.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가 늙고 자신은 젊음을 유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소원은 실현되지만 그 대가는 점점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부패였다. 도리언이 지은 죄와 타락은 모두 초상화에 새겨지고, 결국 그는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그림을 파괴하려다 스스로 죽는다. 이 작품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삶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소원이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W.W. 제이콥스의『원숭이의 손(The Monkey’s Paw)』은 아주 짧은 단편이지만 소원이 실현되는 방식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말의 표면만을 따르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세 번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마법의 손을 얻은 가족은 돈을 원하고, 그 대가로 아들이 죽으며 보험금이 지급된다. 죽은 아들을 되살리길 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체불명의 두려운 존재다. 결국 마지막 소원으로 그것이 다시 사라지게 된다. 이 작품은 '말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신화 속 소원들과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며 단순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욕망의 공포를 보여준다.




고찰




이들 신화와 문학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신은 인간의 소원을 말 그대로 들어준다. 하지만 인간이 말하는 소원은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라기보다 결핍과 두려움의 그림자다. 미다스는 금을 통해 자신의 무가치함을 감추고자 했고 카산드라는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예언 능력을 원했다. 시빌레는 죽음을 피하고자 장수를 소망했지만 삶의 질은 고려하지 않았다. 소원은 욕망의 구체화이며 동시에 진심을 말하지 못한 인간의 고백이다.



신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보호자가 아니다. 말한 그대로 들어주는 존재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언어와 사고를 얼마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인간은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돈을 소원하고, 사랑을 갈망하면서 능력을 빌며, 영원함을 꿈꾸면서 젊음을 말한다. 그러나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결핍을 피하기 위한 방어적 요청일 뿐이다. 신은 그것을 정확히, 그러나 냉정하게 이뤄줄 뿐이다.



그렇다면 신은 왜 그런 소원을 들어주는가? 이것은 인간의 자기 인식에 대한 시험이다. 신은 인간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욕망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직접 보게끔 하는 존재다. 다시 말해 신은 거울이다. 미다스가 원했던 황금은 배고픔과 죽음을 불렀고, 카산드라가 원한 예언은 고독과 살해로 이어졌다. 시빌레의 장수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했다. 소원은 인간 자신이 만든 함정이다.



결국 인간은 감정의 회피 속에서 소원을 말한다. 충수돌기염 환자가 진통제를 달라고 하는 것처럼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그 진통제가 복막염으로 이어지듯 회피적 소원은 더 큰 대가를 부른다. 소원은 말 자체로 벌이 되며 그것을 실현하는 신은 벌을 내리는 자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멸하도록 돕는 무심한 관찰자다. 결국 파멸은 신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에게 소원을 빈다는 행위는 곧 자아를 드러내는 일이다. 누군가는 신의 영역을 넘보며 무한한 힘을 구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요청하며, 누군가는 죽지 않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를 끝내 직면하게 된다. 미다스의 황금, 카산드라의 예언, 시빌레의 생명은 각기 다르지만 모두 자아를 마주한 고백이었다. 신은 단지 그 고백을 이루어주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신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의 소설, 영화, 심지어 일상적 기도문에서도 유사한 욕망의 언어가 반복된다. 이는 인간이 여전히 소원을 욕망의 도구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의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해줄 거라는 기대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대부분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에 불과하고, 그 해석은 오히려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 신이 그 왜곡을 실현시켜주는 존재일 때 파멸은 결국 예고된 귀결이 된다.



소원의 역설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언어로 옮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말은 마음을 대체할 수 없고, 표현은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신은 인간의 말에 담긴 결핍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진짜로 원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이다. 소원은 예언처럼 스스로를 실현시키고, 실현된 순간 파국을 낳는다. 이는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자기 고백의 역설이자 감정의 왜곡이 빚어낸 재앙이다.



그렇기에 가장 지혜로운 소원은 결핍을 감추는 욕망이 아니라 결핍을 인식하는 말이다. 벨레로폰은 신의 영역을 탐내다 추락했지만,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단순하고 정직한 감정만을 말했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이상을 고백했을 뿐이다. 이들은 소원조차 하나의 자기 인식의 과정이었고 그래서 비극이 아니라 자기 실현의 형태로 끝났다. 말의 본질을 아는 자만이 신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




결론




미다스·카산드라·시빌레의 신화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소원의 구조를 되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신이 들어준 소원은 인간의 말이 가진 결핍을 드러내며 감정적 회피가 어떻게 현실을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신은 욕망을 실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결과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결국 우리는 신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것이 미다스·카산드라·시빌레, 신화 속 소원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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