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니데스와 스코파스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자 애가의 대가로 알려진 시모니데스는 테살리아의 왕 스코파스에게 초대받는다. 왕은 자신을 주제로 시를 지어 칭송하면 후하게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시모니데스는 이를 받아들여 시를 짓는다. 그는 직접적인 찬양 대신 신화 속 쌍둥이 신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의 이야기를 인용해 왕의 위업을 빗대어 표현한다. 그러나 스코파스는 자신이 중심이 아니었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약속했던 보수의 절반만을 지급한다. 단순한 언짢음처럼 보였지만 이 순간 작동한 건 인간 사이의 거래를 넘어선 어떤 반응이었다.
자리를 물러난 시모니데스에게 시종이 다가와 밖에서 말을 탄 젊은이 두 명이 자신을 찾고 있다고 전한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궁전을 나섰고 마침 그 순간 연회장이 무너져 스코파스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모두 죽음을 맞는다. 그를 불러낸 이들은 쌍둥이 신의 형상을 한 존재들이었고 시모니데스만이 살아남았다. 신에게 맹세한 것도, 신을 모욕한 것도 아닌 약속에서 왜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 신이 인간의 말을 듣고 응답하는 조건은 어디까지를 포함하는 것일까?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은 말의 책임이 감정보다 앞설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를 말해준다. 병든 아내와의 책임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이선은 하녀 매티에게 기대며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떠나겠다는 말, 함께하겠다는 다짐은 비극적 사고로 이어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묶이게 된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감정도 자유롭지 않았으며 남은 것은 무거운 현실뿐이다. 말의 가벼움이 삶의 무게를 결정짓는 장면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이그의 저주에서는 말이 곧 금기가 되는 상황이 등장한다. 부족은 뱀의 새끼를 죽이지 말라는 경고를 반복하지만 주인공은 이를 가볍게 무시한다. 그 결과 가족이 몰살되고 자신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운명을 갖게 된다. 이 작품은 약속의 배경이 인간 간 신뢰가 아닌 초월적 존재의 질서였다는 점에서 시모니데스 신화와 닮아 있다. 말은 종교적 선언이자 생존 조건이었고 그것이 무시된 순간 결과는 가차 없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말이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규정하는 약속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와의 계약에서 “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너무 아름답다”라고 말하면 영혼을 넘기기로 약속한다. 이 말은 감정이 아니라 실행을 전제한 언어적 조건이다. 결국 이 문장은 단 한 번의 발화로도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언어의 위상을 보여준다. 시모니데스 신화처럼 발화된 말은 발화자보다 크고 그 실현 여부에 따라 세계가 변한다.
시모니데스 신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약속의 주체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신의 응답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시모니데스와 스코파스 왕은 단지 문학적 계약을 맺었을 뿐이고 신은 시 속에서 은유적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보수가 절반만 지급되었을 때 시모니데스를 제외한 모든 이가 죽음을 맞는다. 이 사건은 단지 신의 분노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화는 왜 인간의 말이 초월적 질서를 불러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상징적 틀이다.
고대 세계에서 말은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말은 의지의 구현이며 말하는 순간 현실을 바꾸는 힘을 가지게 된다. 특히 약속은 그 자체로 실행을 전제하는 언어적 행위였다. 약속이 발화된 순간 그것은 단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선언된 명령이 된다. 그 명령이 무시되거나 파기되었을 때 균열이 발생하고 신은 그 틈을 통해 개입한다. 신은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인격체가 아니라 질서가 무너졌을 때 자동으로 작동한다.
시모니데스가 시 속에 언급한 쌍둥이 신은 단지 주제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말은 한 번 발화되면 더 이상 화자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된다. 이때 중요한 건 신을 향한 의도가 아니라 말의 형식이다. 왕은 자신이 중심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시인을 비난했지만 이미 시는 신의 이름을 호출했고, 그 형식적 발화는 실행을 요구하는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왕은 이 말에 분노했고, 그로 인해 질서의 반작용을 초래했다. 결국 발화된 말이 현실로 이행되지 않았을 때 나타난 건 상징적 폭력이었다.
신화 속 신은 판단자가 아니다. 그는 말의 진심을 파악하거나 맥락을 해석하지 않는다. 말이 발화되었고 그것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반응한다. 이 체계는 도덕이나 윤리와는 무관하다. 형식이 충족되지 않으면 반응하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개입한다. 이처럼 신은 인간의 감정적 갈등을 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의 실행 실패에 응답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결국 신의 개입이라는 상징은 실현되지 않은 말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방식일 뿐이다.
이 틀은 현대의 시스템, 특히 알고리즘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진심이나 맥락보다 입력된 명령의 형식과 조건에 따라 반응한다. 실행이 가능하면 수행하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오류를 반환하거나 차단한다. 고대 신이 말의 형식과 실행 여부에 따라 자동으로 반응한 것처럼 AI 역시 감정이 아닌 체계에 의해 작동한다. 말은 세계를 작동시키는 조건이며 그 실패는 곧 시스템 반응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인간의 말은 여전히 결과를 요구받는 장치 안에 놓여 있다.
여기서 말은 더 이상 단순한 교환이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입력이며 책임을 내포한 코드이다. 약속은 그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실행 명령이다. 발화된 약속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불일치는 단지 개인 간의 오해로 끝나지 않는다. 체계는 그 차이를 감지하고 균형을 복원하려는 진동을 보낸다. 고대에는 그것이 신의 형상으로 나타났고 오늘날에는 알고리즘과 자동화된 피드백으로 구현된다. 언어적 조건은 바뀌었지만 말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신화 속 약속이 반드시 발화자 본인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아도 작동한다는 점은 언어의 독립성을 보여준다. 시모니데스는 스코파스를 찬양하면서도 신의 이름을 인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발화는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질서를 호출했고 반응을 불러왔다. 이때 약속이란 말의 주인이 누구인가 보다 그것이 세계에 던져졌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말이 체계에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말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말은 공동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세계는 균형을 되찾으려 반응한다. 이때 나타나는 결과는 처벌이 아니라 회복의 형태이다. 시모니데스를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는 이 극단적인 서술은 언어의 실패가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말은 곧 현실 질서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체계가 선악 판단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스코파스가 나쁜 왕이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반응이 생긴 것이다. 말의 발화와 그 실현 여부만이 문제다. 인간이 감정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든 시스템은 형식과 실행 여부만을 기준 삼는다. 그래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실현되지 않으면 체계 자체가 반응하게 되는 선언이다. 신화가 이를 죽음으로 표현한 것은 그 파급력을 상징적으로 극대화한 결과다.
말의 무게는 여전히 실재한다. 아무리 가볍게 던졌다고 해도 그 말이 형식을 갖추고 실행을 전제로 한다면 결과는 따라온다. 인간은 종종 말을 책임지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세계는 그 말을 기억하고 응답한다. 시모니데스는 신을 호출하지 않았지만, 신은 말의 형식에 의해 움직였다. 그리고 왕은 그것을 무시한 대가로 파괴를 맞았다. 이는 단지 신화적 장치가 아니라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된다.
결국 시모니데스 신화는 인간의 말이 언제, 어디까지 현실에 작용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말이 누구를 향했든, 얼마나 의도적이었든 간에, 실행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개인을 넘어선 차원에서 발생한다. 고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신의 개입이라 불렀고 오늘날 우리는 시스템의 반응이라 부른다. 말은 세계에 흘려보낸 의지이며 그 실현 여부는 여전히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반응을 만든다. 이 신화는 바로 그 틀을 보여주는 하나의 서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