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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스키 Oct 22. 2023

저들이 세뇌된 줄 알았는데, 세뇌된 건 나였다

아기는 진짜 행복을 안다

구호가 난무하는 거리


20개월 아들을 데리고 서울 여행을 했다. 활기찬 인사동을 지나 종로 3가로 향하는, 청춘을 보내며 수없이 오가던 길. 그 길들을 걸으면 추억에 잠길 법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기를 잡느라 땀범벅이 되었다. 무더운 날 상쾌함을 기대하고 청계천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유모차를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지린내가 난다. 다리 위로 시끌벅적한 축제 소리가 들린다. 성소수자를 위한 '퀴어 축제'였다. 기괴한 분장을 한 사람들이 아기의 눈길을 끈다. 주변에 함께 걷는 동성들이 새롭게 보인다. 필터를 거치고 보면 보이는 것들이 다르다.


청계천에 발 담그는 사람들 사이로, 한 다리 밑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보인다. 긴 삼각대를 세워두고 핸드폰을 보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핸드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였다! 셀프 카메라모드의 화면에는 댓글창이 올라가고 있고, 주인공 노숙인은 잠들어 있다. 자는 척하는지, 노숙인인지, 어그로 유튜버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돈 버는 방법, 인생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위 탓인지 경찰 버스가 많이 보인다. 서울 시청 광장에 큰 노란 병아리가 있어 어린이 행사인 줄 알았다. 가까이서 보니 노란 병아리는 종교 행사의 조형물이었고, 한 목사가 큰 무대에서 설교 중이었다. 실망하며 발걸음을 돌리는데, 시청 옆으로 향 냄새가 난다. 반년도 더 지난 이태원 참사 분향소였다. 대부분이 젊은, 망자의 사진들도 걸려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곳을 돌아 나오니 정치적 구호가 담긴 현수막이 보인다.  'ㅇㅇㅇ당은 관련 법 만드는 데 협조하라!'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이 말이구나. 불쌍하게 생을 마감한 이들이 다른 목적을 가진 누군가에게 이용되는 것 아닌가 싶어 불편했다.


광화문 방향으로 가는 거리에는 막 끝난 것 같은 현 정권 퇴진 운동 집회의 흔적이 가득했다. 오염수 방류 허용으로 인한 성토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연결되는 모양새였다. 과학적 논의는 차치하고, 지금 정부가 미운 사람들로 보였다. 누군가 설계한 프레임이 구호와 현수막이 되어 커다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던 것이다.


나도 20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듯한 정치적 구호들을 보고 그대로 생각했었다. 나의 선량한 마음이, 표현하는 애도의 마음이 이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해봤다. 어쩌면 현수막을 걸은 그들 또한 그 마음이 진심일 수 있으니 그 선동 자체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선동에 지나치게 취약한 '신선한 뇌'였다.


아들아, 정치만은 하지 마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의 붉은빛과 노사모의 노란 물결이 온몸을 휘감았던 그때 대학생이었던 나는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다. 내가 깨어있고, 활동하는 의식 그 자체로 여기고 일종의 선민의식도 있었다. 나는 정의롭고, 행동하는 양심이며, 내가 세상을 바르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하루들이었다.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젊음을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그때가 조금 부끄럽다.  조금 더 감정과 이성을 분리했더라면 젊음이 좀 더 생산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상에 목소리를 내려면 더 공부하고 길에 나서볼걸. 다 아는 척, 혼자 정의로운 척하지 말 걸. 가진 것이 없었던, 내 인생에 더 충실할걸.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니 부끄러웠던 열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다. 나는 순수했고, 정의감과 열정에 불타올랐다.


투표할 때 나는 정의롭고, 반대쪽인 저들은 정의를 알 지언정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 소중한 투표권을 날리는 줄 알았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언론과 부자들, 친일파에서 이어져온 기득권 세력과 재벌들이 못된 마음을 먹고 탐욕에 눈이 멀어 불쌍하고 착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동가들이 지어낸 프레임에 갇혀있었다. 책으로 연애를 배우는 것처럼 간접체험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떠들고 다녔다. 단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했고 지어낸 글과 영화를 보고 감정이 앞서 태도를 결정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당연히 세상은 아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 발언도 많이 했던 신해철도 아들에게는 그런 말을 남겼다. 넥스트 노래 <아들아, 정치만은 하지 마>에서 '남들은 싸우든 물어뜯든 난 롹앤롤, 싸우든 물어뜯든 춤추자'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도 언젠가는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될 때, 사람들이 하는 말에 휩쓸려, 어떤 이념의 아름다움에 경도되어, 선민의식에 휩싸여 정치적인 생각을 하고, 어떤 정치색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남의 의견, 함부로 평가하거나 그들이 세뇌되었다고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든지 만만히 살아온 사람도 없고, 내가 선동되었다고 생각하는 다른 세상 사람들의 그 판단 속에도 피를 토하며 겪어온 인생의 경험이 녹아있을 수 있다.



아이처럼 행복하기


아이를 안고 광화문 가까이에 오니 퀴어축제 반대하는 현수막도 걸려있고, 코로나 백신 피해자 모임 부스도 차려져 있다. 미국대사관 근처에 오니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한미동맹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과격한 언어가 미적 감각 없이 난사된 거리에서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거리의 목소리들은 거칠었지만 이성보다 감성이 가득했다.


종로의 산책 길에 있던 청춘의 추억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좋은 시절이었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그때 거리의 풍경이, 이제는 현실로 보인다. 세뇌당한 건 나였었구나.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라고 하는데, 이미 남겨두기가 힘들다. 변한 모습과 변한 나를 만나버렸으니. 하지만 20년이 지나도 행복한 순간을 추억하는 것을 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광화문 광장으로 오니 20개월 아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여름 물분수를 발견한 것이다.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간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분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희열의 탄성을 지르며. 예상은 했지만 너무 좋아한다. 진실로 행복한 미소. 비명 같은 웃음소리로 하염없이 분수에서 놀았다. 뒤가 없는 돌진이다. 여벌 옷도 없는데. 집에 가는 동안 감기 걸릴 텐데. 분수에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노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어지러운 마음을 청소해 주는 듯했다. 한쪽만 보지 말고,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믿지 말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여유롭게 행복하라고.


거를 타선이 없던 종로에선 우리 아기가 가장 강했다. 원래 싸울 생각이 없는 쪽이 가장 강하다. 우리는 모두 원래 아기처럼 하염없이 뛰어놀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 구역의 슬픔과 논란은 인생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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