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마이크로 단편선
장소는 어디, 아 아는 곳이에요 좋아요 날짜 체크했어요 그때까지 도착하면 되는거잖아요? 알겠어요
L은 뻔한 표정을 짓는다.
돌아오는 9월 23일은 그런 날이다. 11시반에 한탕을 뛰고, 단체 원판 사진을 찍고 나서는 바로 시내에 있는 예식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 날은 저녁 7시까지 Full이다. 신랑신부들의 얼굴을 본다. 고민했겠지. 추석 연휴가 끼어있으니까, 23일 결혼하면 장장 2주를 쉴 수 있다. 다음 황금연휴는 8년 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라며 이날 예식장을 부킹했겠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신랑신부의 뻔한 표정.
똑같은 레퍼토리. 이때 신랑이 깜짝 이벤트를 하고, 이때 신부가 울겠지. 20년 동안 스냅 작가 일을 해온 L에게는 모든 것이 그냥 ‘일’이었다.
진부 그 자체.
똑같은 장면에 똑같은 사진들.
예식 장소에 도착한 L은 노트를 꺼내본다. 12시 반 예식은 예배 형식. 캐주얼한 요즘 결혼식과 반대로 정적이기 때문에 더욱이나 새로운 그림이 나오기 힘든 케이스다. 게다가 조명도 신비로운 감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드는 주광색 직접 조명. 그럼 내가 움직여야지, 라고 한숨 섞인 말과 함께 L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었다. 식장을 돌아다니며 신랑과 신부, 혼주와 하객의 얼굴을 찍는다. 찰칵 찰-칵.
셔터를 얼마나 눌렀을까, 어딘가에서 다른 묵직한 셔터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묵직하지만, L에게는 매우 경쾌한 듯한 소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정장에 넥타이를 한 사내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신랑의 얼굴을 찍고 있었다. 하객 친구 중에 카메라 좀 만지는 친구가 있나보네,
라고 L은 생각했다. 이윽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멀리서도 들리는 셔터 소리가 자꾸 신경쓰이는 것이다. L이 다섯컷을 찍을 때 그 사내는 여섯컷을 찍었고, 입장하는 신부를 찍고 있을 때면 그 사내는 신부 뿐만 아니라 신부를 보고 있는 신랑의 얼굴도 찍었다. 신경 안쓸래야 안 쓸수가 없었다. 보통 스냅 작가만 강단에 올라 사진을 찍을 ‘권리’를 가진다. 사실 권리랄 것은 없고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셈이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 사내가 섰던 자리에서 카메라를 들어보니 왜 그런지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카메라를 재밌게 다루고 있었다. 정말 재밌게. 여기서 일반인 고수를 만나다니, L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찰칵 찰-칵
가만 보니 카메라 기종도 아마추어라 하기엔 하이엔드 모델이다. 저 모델을 일반인이 취미로 가질 수 있는 카메라인가. L은 왼손에 들고 있는 바디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좀 났는지 미끌거렸다.
부킹이 1시간 마다 되어있는 웨딩홀에 비해 교회 예식은 시간의 제약이 없다. 주례를 맡은 목사님의 설교는 그래서 무척 길었다. 같은 포즈의 같은 표정. 그래, 전문가의 기량은 여기서 갈음한다. L은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동의 같은 장면 속에서 핀 포인트를 잡아내 포착하는 것이 바로 경륜. 승부는 여기서 본다.
“신랑은 아내를 이해하고 또...”
주례 말씀을 듣는 신랑신부의 표정이 비장하다. 목사님의 표정도 근엄하다. 이 표정 이상의 뭔가를 잡아내야 한다. 하지만 신랑 신부 모두 긴장했는지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뷰파인더로 구도를 잡고, 그 순간의 찰라가 나올 때까지 부동이었다. 숨을 최대한 참고 앵글이 벗어나지 않도록. 나와라, 나와라.
순간, 짧지만 강한 목사님의 유머가 터졌다. 하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고, 신랑은 웃음을 참는듯 고개를 숙었다. 신부도 보조개가 살짝 보이게 미소를 지었다. 이때, L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고
찰-칵
경쾌하고 시원한 셔터소리가 났다. 그리고 L은 팔을 걷었음에도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지도 않았지만 L은 이번 예식 최고의 사진을 찍었음을 확신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 커리어에서 자랑할만한 사진을.
어때,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사내를 바라보자,
L은 믿을 수 없었다.
사내는 웃고 있는 혼주를 찍고 있었다. 신부 측의 어머니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었고, 그 눈물과 함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나중에 사진이 나왔을때 신랑신부가 가질
감동의 크기로 따지자면 어떤 것이 더 클까.
찌릿
L은 심장이 찌릿거렸다.
대학생이 되어 첫 바디를 손에 쥐었을 때 그런 찌릿. 매번 찍는 그런 장면과 사진이 아니라 익숙한 풍경 속에 새삼스러운 새로움을 찾는 것이 사진가의 눈이라고 생각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피사체에 제한이 없었고, 상상하는대로 찍을 수 있었던 그때.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졌다, 라고 생각했다. 다시 신랑신부를 바라보았다. 주례목사님과 혼주들, 하객들을 바라보랐다. 결혼식 전경을 바라보았다. L은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찰칵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