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트랄 마이크로 단편선
주인은 칠칠치 못한 편이었다. 귓구멍도 큰 편이었다. 칠칠치 못하고 귓구멍까지 크면 나를 잃어버릴 확률은. 뭐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주인을 만난 지는 일 년 정도 됐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여자친구가 생일선물로 나를 주었을 때 그 또롱한 눈빛을 기억한다. 고맙다며 그녀에게 뽀뽀 세례를 했다. 내 직감으로는 그녀도 그 못지않게 나를 갖고 싶었던 것 같은데 둔한 주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주인과 그녀는 기념일을 잘 챙겼다. 에어비엔비에서 둘은 즐거운 시간을 기대했다. 용산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외부인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곳이었는데 키를 찾는 것도 비밀 작전을 하는 것처럼 처리했다. 누군가 물어보면 친구라고 둘러대라고 행동 지침까지 있었다. 그런 미션까지 감수한 이유는 주인이 이곳 야경을 맘에 들어했기 때문이다. 용산의 삭막한 빌딩 야경. 나중에 알고 보니 에어비엔비는 금지인 곳이었다.
기념일답게 스테이크와 와인을 챙겼다. 야경을 앞에 두고 나와 같이 내가 입을 케이스까지 선물했다. 스누피가 그려진 빨간색 키링 케이스였다. 주인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며 여자친구의 센스를 칭찬했다. 아이폰에 연결하니 띠링하며 내가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세상 처음.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한참이나 잠을 자다가 햇빛이 비쳐 눈을 뜨는 느낌이다.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소리가 나는 걸 주인은 호들갑을 떨면서 좋아했다. 나는 으쓱했다. 귀에 꽂은 나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니까 다음 노래를 재생할 수 있었다. 주인의 호들갑은 두배가 됐다. 여자친구에게도 해보라며 난리가 났다. 나는 더 으쓱했다. 선 있는 녀석들이랑은 차원이 다르지 내가.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여자친구가 나를 들어본다며 귀에 꽂았다. 그녀가 앉아있던 곳은 작은 소파였는데, 그녀가 자지러지게 웃자 그 소파가 뒤로 넘어갔다. 물론 그녀도 넘어갔다. 발로 그 앞에 유리로 된 탁자를 찼고 탁자 위에 있던 스테이크 접시와 와인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접시는 무사했지만 와인잔은 무사하지 않았다. 스테이크 사이로 와인잔 파편들이 굴러다녔다.
가장 무사하지 않은 건 그녀였다. 주인이 어떻게 손써볼 새 없이 내동댕이 쳐진 그녀는 상황 파악하기도 전에 밀려오는 통증에 울음을 터뜨렸다. 뒤로 넘어가면서 소파의 손 받침 부분이 목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주인은 급하게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찜질을 해줬다. 아픈 게 가시질 않았고, 어느새 나는 안중에서 사라졌다.
나는 깨진 와인잔 사이에 흥건한 와인에 하나, 하나는 그녀의 귀에 있었다. 목은 아무래도 괜찮으니 다시 좋은 시간 보내면서 내가 가진 특기들을 음미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들은 멘붕이었다. 오늘 기념일은 끝났네 -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로 일 년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날 잘 대해줬고 가끔이지만 청소도 해줬다. 아, 이름도 지어줬다. 그가 나를 사용하는 패턴은 정해져 있었다. 퇴근길. 퇴근하면서 나를 끼고 집에 도착해서 나를 뺐다. 그 길이 가장 행복했다. 주인이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좋은 소리를 많이 들려줄게,라고 생각했다.
주인의 여자친구가 첫날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일은 갑자기 생겼다. 주인은 고속버스를 탄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잠에 드는 경우가 있다. 침을 흘릴 정도로 주변 상관없이 숙면을 취하는데 이때 내가 귀에 있으면 문제가 일어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주인은 칠칠치 못한 데다 귓구멍도 크고, 거기에 잠까지 잘 든다. 나를 잃어버리기 딱 좋다.
사실 이제까지 날 잘 데리고 다닌 것만 해도 행운이다. 유튜브를 보다가 꾸벅꾸벅 조는 주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더 구멍이 커서 헐거웠던 왼쪽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 됐다. 일, 보, 직, 전에 오른쪽이 어떻게 할 수 없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평소 같으면 민감하게 바로 깨서 나를 찾을 텐데 주인아 피곤하니 깨질 않는다. 나를 찾아야지, 왜 아직 자고 있어.
주인이 내릴 정류장에 다다랐다. 바이오리듬이 딱 내리는 그곳에 맞춰져 있어 주인은 내릴 정류장 전에 잘 깬다. 여기서 희망이다. 깨서 나를 찾아. 나를 찾아 다시 사용해줘. 주인이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서둘러서 내린다. 어라, 나는. 내 왼쪽은 아직 니 자리 바닥에 있어.
주인에게 실망한 것은 왼쪽이 없어진 다음 행동 때문이다. 얼굴 하나 바뀌지 않고 머리를 긁적인다. 여자친구에게는 문자로 집에 유선 이어팟이 있는지 물어본다. 지금 나를 버리고 유선을 쓰겠다고? 나를 소중히 하지 않는구나. 너에게 나는 소중하지 않았구나. 넌 부자도 아닌데, 나를 또 살 수도 없을 건데 왜 이리 태연한 건데.
그렇게 나는 유실물 센터로 흘러들어왔다. 버스 기사는 바닥에 떨어진 나를 발견하곤 처음에 쓰레기 취급을 하려고 했다. 기사 동료로 보이는 사람이 그거 비싼 이어폰이라고 말해주는 바람에 유실물 취급을 받게 됐다. 나 말고도 지갑,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쇼핑백, 스마트폰 같은 것들이 많았다. 칠칠치 못하는 주인이 많구나.
주인이 올까. 나를 찾으러 올까. 그냥 선 있는 그 녀석에 만족하고 살까. 우리 좋았잖아, 추억도 많고 - 말하고 싶어도 주인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너무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