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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Dec 21. 2022

정뚝떨 모먼트가 온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꼴 보기 싫어지기 전에

정뚝떨이라는 말이 있다. 정이 뚝 떨어졌다는 말인데, 보통 연인 사이에서 쓴다. 뭔가 연결되어 있던 하나의 끈이 뚝 끊어지는 것이 상상된다. 이제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구나 처음은 좋다.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고 표현한다. 그러고 나서 10년 뒤, 20년 뒤의 모습을 보자. 옛 어르신들의 말로 ‘웬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정뚝떨 모먼트 이후에 마지못해 살았던 경우일 것이다. 사랑스러웠던 그 사람의 모든 것,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꼴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10년 20년을 서로가 의지하고 아끼고 흔하게 결혼식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처음 상대를 결정할 때 그런 미래를 상상하지는 않았을 터다. 무슨 차이였을까?


정뚝떨, 정이 뚝 떨어지는 순간부터 정의해 보자. 정뚝떨이란, 바로 내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행동과 말을 했을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본인이 기대했던 상대의 그림과 크게 차이 날수록 임팩트가 크다.


예를 들어 댄디한 남자친구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더러움 모먼트가 많았다든지. 의지가 되는 아내를 기대하며 결혼했는데 오히려 직장 상사보다 더 압박을 주는 것처럼 정뚝떨의 순간은, 사실상 거의 모든 순간일 수도 있다.


결국 기대와 현실에서 오는 괴리가 정을 떨어지게 만든다. 괴리는 당연한 수순이다. 내 머릿속으로 그렸던 기대대로 현실이 그려질리는 없다. 문제는 그 순간을 얼마나 줄였는지, 그냥 방치했는지에 따른다.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산 연인과 웬수처럼 산 연인의 차이는 이것이다.


우리 부부가 친구를 만났던 어느 저녁에 친구가 우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서로 각자의 삶을 살다가 같이 살게 되면 부딪히거나 그렇지 않아?“

“아니. 나는 우리가 같이 그린 로망대로 살고 있는 걸.”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그리고 있는 관계에 대한 그림과 상대의 그림을 얼마나 일치시키느냐에 달려있다. 그 그림에는 나의 역할도 있고, 상대의 모습도 있다. 이런 그림을 디테일하게, 아주 많이 만들어둬야 한다. 함께 말이다. 같이 있을 때 행복한 그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서로 꿈꾸듯이 말이다.


그럼 정뚝떨이 끼어들 틈이 없다. 물론 100%는 아니겠지만 현저히 줄어든다. 매 순간 같이 이야기했던 순간이기 때문에.


바쁜 아침에 아침밥을 차려주는 것도 로망의 순간이고, 같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담요 속에 뒹구는 것도 꿈꾸는 순간이다. 간혹 상대가 토라져도 다시 속이야기를 하며 풀어내는 것도 감사의 순간이다. 때때로 예기치 않는 행동을 할 때도, 나를 돌아보며 나도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하며 그 모든 순간 같이 있고 함께 하는 걸 꿈꾼다.


전제는 둘이 같이 하는 것이다. 같이 꿔야 하고, 공동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런 그림을 같이 그리고 싶다고 계속해서 표현해야 한다.


정뚝떨은 바이러스 같아서 한번 생기면 어느새 상대에 대한 모든 것으로 번져나간다. 한번 정뚝떨 모먼트가 왔다면, 그건 상대가 못나서 그렇게 보인게 아니라 관계를 한번 점검해보라는 신호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 꿈꾸며 점검하고 뒤돌아보고 바라봐야 한다. 그래야 머리를 파뿌리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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