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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 Sep 09. 2016

여배우의 시상식

왜 여배우는 시상식에서 그 드레스를 입었을까

처음 사장의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라고 뒤물어봤다. 사장은 애써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했다. 아메리카노를 마셔도 그거보단 더 씁쓸한 표정 나오겠다 이 새끼야.


사장님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카페에 부를 때부터 알아봤다.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스케줄 없냐고 영업팀장 갈구는 게 사장 일이었다. 소속 여배우인 나와 할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장이 달라진 건 생각해보면, 작년 그때부터였다. 연말 시상식이 있었을 때 어디서 나온 듣보잡 배우가 포털 검색어를 휩쓸었다. 그 배우는 사장과 오랜 친구였던 김씨가 대표로 있는 소속사의 배우였다. 그 일련의 해프닝을 보더니 사장은 왠지 모르게 노발대발했었다. 아, 이제 이해가 간다. 사장은 왜 우리가 먼저 이걸 생각해내지 못했지 라는 분함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그걸 나를 통해 풀려고 한다.


“저기, 이번 기회에 이름도 알리고 좋잖아. 일단 여배우는 이름부터 알려야 돼. 대중들한테 이름 석자 알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잖아. 아무리 좋은 작품 좋은 연기 한다고 안 알아줘. 대중이 원하는 건…”

“노출이라는 거죠?”

“그.. 그래. 그래 노출. 좀만 그 몇 시간만 참아봐. 넌 바로 스타가 될걸.”

“이봐요 사장님.”


사장의 얼굴 바싹 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사장 이 놈도 미안함은 있는지 눈을 깐다.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 연기하려고 배우가 된 거예요. 벗을라고, 포르노 찍으려고 배우 된 게 아니라고요.”

“알아 알지. 알아 그 마음. 근데 봐. 네가 연기하고 싶아도 못하는데 지금 현실이다. 우리 너 연기력 인정해. 그래서 데리고 있는 거고 좋은 작품 만나기만 하면 넌 분명 뜰 거야. 근데 문제는 네가 연기를 해야 하잖아. 작품을 해야 하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작품이 안 들어와 작품이. 오디션까지 다 퇴짜 맞았다고. 내년 상반기까지 쫙!”

“…."



사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제까지 단역이라고 작은 역이라도 계속 해왔었다. 이대로 조금씩 큰 역을 맡고 언젠가 주인공을 맡는 게 목표였다. 그걸 믿고 참아왔다. 그런데 역이 끊겼다니.


정신이 아득했다. 회사에서 그렇게 고군분투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 사장의 얼굴도 많이 상했다. 눈 옆의 자글자글한 주름들. 다… 나 때문인가? 나 하나 뜨게 하려고 고생하다가 저리 된 건가. 주인 잃은 강아지 마냥 날 바라보고 있는 사장을 포함해 날 믿는 회사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근데…”

“왜, 뭐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다 해줄게.”

“시상식 초대를 안 받았는데 어떻게 가요. 난 완전 무명배우인데.”


시상식 이야기를 하자, 사장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건지 불안한 건지. 정말 이 새끼는 속마음을 숨기질 못한다니까.


“그거야 이미 다 손을 써놨지. 넌 드레스나 골라.”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은 불편하다. 게다가 주목까지 받는다면. 가장 꺼림칙한 부분이었지만 사장은 드레스 카탈로그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한 열 가지 정도 되는 드레스 사진이 있었다.


“이게 다예요?”

“더 있는데… 사실 뭔가 강렬하게 눈을 끌만한 디자인만 남겨놨어.”

“누구 기준으로요?”

“누구긴 누구냐. 나지.”

“아하, 이런 게 사장님 취향이구나. 시스루?”

“사실 여기 뭘 입든 내일 실검 1위는 따놨어. 넌 그냥 가장 이 중에서 하나 고르면 돼. 네가 보기에 제일 이쁜 걸로 골라봐.”


매년 연말이 되는 여배우들은 전쟁을 치른다. 1년 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패션. 가만 생각해보면 배우는 당연히 연기를 봐야 하는데 패션모델이 아닌데, 왜 베스트니 워스트 하는지 모르겠다. 뭐 그런 거겠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면 레드카펫에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이 그녀를 찍고, 인터넷에 ‘한파 모르는 그녀의 섹시 노출’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내보내면, 또 유저들은 그걸 클릭하고. 하여간 남자들이란. 누군가 원하니까 이런 되지도 않는 트렌드가 생긴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장이 준 카탈로그를 한 장씩 넘겼다.


“이건 옆이 아주 다 보이는 드레스네요?”

“응. 측면 시스루. 아마 여기 있는 것 중에 가장 파격적일걸?”

“그럼 이걸로 해요.”

“이거? 괜.. 괜찮겠어?”

“왜, 하지 마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사장님도 제 성격 알잖아요.”

“아, 알지.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사장은 이번만 고생해달라며 몇 번을 더 말하더니 카탈로그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난 그 후로 그 자리에 오랜 시간 혼자 앉아있었다.


며칠 뒤, 특별 제작한 드레스가 도착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검은 천으로 가슴과 엉덩이 부분만 가렸을 뿐 나머지는 망사로 된 시스루 패션이었다. 아니, 말이 시스루지 이건 레이디가가 정도가 돼야 입을 수 있는 엽기 패션이었다.


“어때, 괜찮아?”

“… 괜찮을 리 있겠어요?”

버럭 화를 냈다. 영업팀장은 드레스 가방을 들고서 사장 옆에 쭈뼛쭈뼛 섰다. 그래, 내가 이것들 얼굴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실검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내가 올라가 줄게.


꾸준히 연기만 하면 잘될 줄 알았던 순진한 스타 지망생. 우연히 미인대회에 출전했을 때가 떠오른다. 우연과 우연의 연속. 그게 운명인 줄만 알았다. 지금 소속사를 만나게 되고 어느새 연기는 내 운명이 되었다. 그래서 나라는 여배우의 운명을 완성시켜주려고 이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리고 있는 이 새끼들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드레스를 입었다.


시상식 날이 됐다. 스타들이다. 기자들의 플래시는 그들을 반사시키며 더욱 빛나게 한다. 사랑받는 자들. 사랑을 먹으며 더욱 커지고 빛나는 별들. 그 자리에 섰다. 난 무슨 운명일까. 스타, 일개 소속사 여배우. 무명배우, 아님 노출증 걸린 관심병자. 레드카펫을 밟는다.


순간, 눈이 부시다. 눈을 뜰 수 없다. 빛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환호, 아님 야유인가? 카메라 소리도 들린다. 환청인지는 모르겠는데 사장이 뭐라 소리치는 것 같시도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상식의 모든 카메라가 나를 향해 섰다. 저 여배우 이름 뭐야! 저기, 옆으로 포즈 좀 해주시겠어요? 여기 봐주세요! 카메라의 빛이 터진다. 세상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다. 이제까지 받아본 적 없는 세상의 시선. 그 빛을 받으며 레드카펫 위에 선 나는 비로소


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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