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지우기 프로젝트
엄마는 하얀 재가되었다. 엄마를 절에 모셔놓고 돌아온 집은 여전히 엄마로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엄마가 정리하시다 만 부모님 사진이 놓여있었다. 몇 년 전 한국 방문 때 찍어드렸던, 두 분이 예쁘게 웃고 계셔서 뽑아드린 사진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셨던 아빠는 그 사진부터 치우시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엄마 지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물건들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눈물이 한 움큼씩 떨어졌다. 엄마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온통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들 뿐이었다. 드레스룸에서는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을 연 순간부터 엄마냄새가 새어 나왔는데, 엄마가 즐겨 입던 잠옷부터 손이 갔다. 한 움큼 쥐어 냄새를 맡아본다. 뒤따라 온 동생도 잠옷에 코부터 들이밀었다. 엄마냄새. 포근하고 따뜻하던, 엄마를 안으면 종종 나던 그 냄새. 그렇게 드레스룸 프로젝트도 시작되었다. 이곳은 보물창고 같았다. 엄마가 자주 쓰시던 액세서리들과 향수들, 좋아하시던 옷들과 매년 기록하시던 다이어리들, 그밖에 엄마의 자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옷들과 가방들을 서둘러 들고 가 여동생과 나 둘만의 패션쇼부터 열었다. 여동생과 나는 사이좋게 이 옷 저 옷 입어본다. 서로 냉정하게 바라보며 어울리는 옷들을 골라주다 울다가 웃다가, 추억이 유독 많던 옷들 앞에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기억하고 싶던 옷들이 얼마나 많은지. 품 안에 가득 챙기고서는 나머지 옷들을 정신없이 정리해 유품정리업체에 전달해 드렸다. 이번에는 액세서리파트였다. 엄마가 자주 끼시던 액세서리들을 정리하다 문득 익숙한 반지를 찾았다. 여자들끼리 맞추었던 새끼반지였다. 우리 셋이서 새끼손가락에 끼고서는 이리저리 돌려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같이 맞췄던 반지를 나만 쏙 잃어버려서 무척 속상해했었는데, 동생이 내게 엄마 반지를 건네주었다. 엄마 새끼손가락에 맞던 반지는 내 약지손가락에 예쁘게 맞았다. 그 반지들을 맞췄을 때 엄마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열 살 정도 더 많았을까. 결혼 전에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던 엄마였는데 애 셋 키우느라, 친정부모님 모시며 사느라, 삼시세끼 새로 한 밥만 드시던 아빠 챙겨드리느라 손가락이 굵어질 대로 굵어졌던 우리 엄마. 그렇게 우리의 추억은 엄마 새끼손가락에서 내 약지 손가락으로 옮겨왔다.
아빠는 엄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싶어 하셨다.
“다 버려뿌라. 뭐가 아깝노.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사람 저기 두고 왔는데……. 아빠는 이제 세상에 아까운 거 하나도 없다.”
그 말을 하시곤 한동안 방에 들어가 나오시질 않으셨다. 첫째는 학교를 가야 해서 남편과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고, 나는 엄마의 첫 제를 지내고 둘째와 돌아가기로 했었다. 그때까지 엄마가 좋아하시던 곳들과 음식들을 남은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지만 정리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청소만 했다. 엄마가 매년 쓰셨던 다이어리에는 페이지마다 네 잎클로버가 붙어있었다. 그 많은 행운들이 조금만 더 엄마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의 글씨가 가득하던 다이어리들도 엄마의 옷들도 엄마가 쓰던 화장품들도 엄마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들은 살아남지를 못했다. 아빠는 엄마의 부재를 알려주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으신지 그 많던 것들 중에 오직 염주 한쌍만이 살아남았다. 얼마 전 엄마가 다녀오셨던 설악산에서 받아왔다던 염주들. 봉정암 스님께서 부부가 나눠 지니라며 한쌍으로 주셨다던 염주는 하나는 아빠팔목에서, 남은 하나는 막냇동생 팔목에서 간신히 염명하게 되었다. 엄마의 역사가 그렇게 정리되어 갔다. 매일 저녁 노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라치면, 여동생이 맥주를 한 캔씩을 꺼낸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여동생은 그렇게 매일 밤을 맥주 한 캔과 보내기 시작했고,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생각들에 파묻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밤을 밝히는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