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을 깨야 하는데..

잘 만들었네

by 진이

"자기는 종교 있어?"


뜬금없이 종교를 물어보는 회사 선배님의 물음에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없어요"


"그럼 집에서 안 쓰는 컵이나 그릇 있지? 그거 하나를 비닐봉지에 싸서 나올 때 깨트려봐"


최근 들어 "삼재인가!"를 입에 달고 사는 상황들이 지속되고 있다. 나의 푸념을 들은 옆팀의 선배가 내민 답이었다.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이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주섬주섬 안 쓰는 그릇을 찾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다소 너무 고전적인 방법이지 않나요?'

라고 말을 꺼내려다가, 마음 한편이 따뜻해져서 얼른 주워 삼켰다.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하면서 "그건 오지랖이지"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업무의 선을 그어 주시던 분의 조언이라 왠지 더 혹하게 들렸나 보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분통 터지고 억울하고 속상한 날.

몸속의 화기가 끓어 올라, 타인이 느낄 수 있는 지경까지 간 경우.

아주 작은 일상의 일 하나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정책이 변경돼서...

하필 내 담당 지역만...

갑자기 몰려드는 전화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하고 흥미로운 각양각색의 케이스.

그렇게 그 건에 대한 '담당자'가 나도 모르게 되어 있고..


늘 그랬지만,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일들은 단발로 발생하지 않고, 항상 동시에 연속해서 몰아치는 경향이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힘드니까 정신 돌아오기 전에 일하라고 그렇게 몰아치나 보다.



벗어나고 싶은 일들과 풀고 싶은 일들을 되뇌며 힘 껏 내리쳤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얌체공?


하얀색 머그 컵이 밝고 경쾌하게 튀어 올랐다.

국산인가? 참 튼튼했다.


황급히 비닐봉지 입구를 조여 매고서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혹 누가 본 것은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쓰레기 분리 문제가 있을까 봐 '깨진 그릇'이라고 적어 놓은 종이가 비닐봉지 안에서 의미를 잃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머그컵 너마저...


사실.. 부끄럽고 화가 나는 이유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공처럼 튀어 오르는 머그컵 때문이 아니다.


뭐 하나 되는 게 없네!

이게 공이야!

왜 통통 튀냐고!!


이렇게 구시렁거리고 있었지만, 사실 비켜가고 싶은 현실에 쉽게 도피하려고 하는 그 모습이 부끄럽고 화가 났다.


굳이 어렵게 살 필요는 없겠지만, 늘 그렇게 쉽게 쉽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내 모습에 화가 난 것이다.


다시 한번 비닐 입구를 틀어막고 땅바닥에 내리쳤다.


쨍그랑!


책에서 봤던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정말 '쨍그랑' 하고 깨졌다.


이게 또 뭐라고 안심이 되었다.

답답한 일들이 쨍그랑하고 부서져 버리는 상상이 되었다.


헛웃음이 나온다.


간사한 사람 맘이 또 기대를 하게 만든다.



뭐 하나 되는 게 없고 모든 것이 다 실패한 것 만 같은 기분이 들던 날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팅"하는 한 음절, 단 한 음절에, 실패가 당연하고 결정된 것 같은 낙담에 빠졌다.

그래서 화가 났고 성질나서 "쨍그랑"하고 화를 내 버렸다.


내가 참 못난 실패자라고 생각될 때 컵을 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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