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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하다 Jul 06. 2023

아무것도 아니어도 바르게 건널 수 있다면

오늘 건넬 문장: 『비행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다시 만난 서른,

그리고 누군가 건너갈 서른에게.




21년, 20대 마지막에 만난 아이유 노래 <아이와 나의 바다> 중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아이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겨우 내가 되려고 아팠던 걸까.


23년,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됨에 따라 다시 서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2년 전 29살에 들은 위의 노래 가사와 비슷한 문장을 만나 기시감이 들었다.


김애란 작가님 소설 <서른>에서 수인은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보며 말한.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노래 속 '아이'가 소설 속에서 내가 아니라 너로 바뀌었을 뿐인데 뒤에 오는 '겨우 내가 된다'는 무서운 말된다. 21년과 23년 두 번의 서른 직전에 오래도록 붙잡은 문장들은 같아 보이지만 달랐고, 서른을 맞는 나의 마음가짐 역시 그랬다.  




기나긴 수험생 시절이 입시 실패로 끝나고 서른을 앞두고 있었다. 수인이가 느꼈듯이, 혼자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어서 불안해졌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서 참담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아무 쓸모도 없는 나를 견딜 수 없어, 서른 되기 3일 전 직장에 취직했다. 적어도 아무개가 아니라 직장인은 될 수 있으니까.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서른, <비행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첫 직장에서 계약서를 한 달이 다 돼서야 쓰고, 연봉도 처음 입사할 때 얘기된 금액보다 깎다. 그래도 꾸역꾸역 참고 일했다,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지만, 점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선임이 오전에 출근하지 않아 업무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고, 하다 하다 입사 전 선임의 업무 실수조차 내 책임이 되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자신도 나쁜 행동에 물들게 된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려고 이토록 성실하게 살았던 걸까. 겨우 내가 된 것도 아픈데 여기서 더 나빠지고 싶지 않아 퇴사를 결심했다. 그렇게 다시 아무것도 아닌 나로 돌아왔다.


나를 미워는 일을 그만두고, 나랑 다시 잘 지내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시간들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한 달가량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여행을 떠나 할머니와 둘만의 시간도 보내고, 밀린 책도 맘껏 읽었다. 서서히 아무것도 아닌 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고작 내가 된 나를 용기로 마음먹자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란 손님 대신 아름다운 감정 손님이 나를 방문했다. 책을 추천하는 책방지기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책 그리고 책처럼 다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님을 만난 덕분에. 그런 작가님들을 좋아하고 닮아가려 다 보니 점점 행복해졌다.

'책과 작가님'이라는 기댈 수 있고, 마음 머물 공간생겨 든든하다. 


충분하다.


다시 만난 서른, 여전히 '겨우 나'지만 더 이상 아프지도 불안하지 않다. 

다만 서른을 건너올 아이들 역시 겨우 내가 된다면, 겨우 나일지라도 앞으로의 30대를 바르게 건너가고 싶다. 서른이 될 아이들이 나쁘지만은 않은, 개개인이 '행복한 내'가 되길 바라기에.


저도 그랬으면 싶어요.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서른, <비행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아직 내가 발 디딜 자리가 명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가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나아가길 바라는 작가님들을 따라 쓰는 사람으로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바르게 건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단 한 사람의 편들어주는 글을 쓰며 돌보는 마음을 함께 이으 훗날 나 자신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너로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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