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책에서 견딜 수 없을 때 노트를 펼쳐서 뭐든 쓰면 금방 마음이 편해진다던데, 정말 그럴까요?
지음이 물었다.
그럼, 나도 마음이 답답할 때 일기 쓰곤 해. 흠... 그냥 하루 일과를 쓰는 건데 도움이 된다고요? 학교 숙제처럼 뭐 했는지 나열하기보다는, 너의 마음을 그날그날 들여다보는 거지. 상처받은 마음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정확하게 그려봐. 그러면 글이 마치 너를 받아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랬거든. 이제부터 써봐야겠어요.
쓰는 사람으로 내딛는 첫걸음을 응원해. 일단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부터 해보자.
잘 준비를 마치고 누운 지음은 뽀야를 껴안으며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진짜 집 같다는 생각을, 집이 '사람이 가장 편안해질 수 있는 공간,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공간'을 의미한다면 이런 곳을 말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여름은 그런 지음을 바라보며 자신들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하며 성심으로 어루만지는 작가님들의 좋은 언어로 마음속에 새겨진 나쁜 언어를 지울 수 있길 희원했다, 자신이 그랬듯이.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난 뽀야가 지음의 등을 긁는다. 산책하러 가자는 신호다. 겨우 눈을 뜬 지음은 창문 너머로 바다 위에 빛나는 윤슬을 바라본다.
알겠어. 산책하러 가자. 물 더 마시고 가자.
지음과 뽀야는 햇살 아래 돌담길을 산책한다. 열심히 '좋아요' 표시를 하는 뽀야를 쫓아가느라 지음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일기를 쓰면 그 글이 나를 지켜줄까. 나조차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가 없는데, 노트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니.
일단 여름 언니 말을 믿고 지음은 써보기로 결심한다.
산책하고 돌아오니, 여름이 간단한 아침을 준비해 놨다. 토스트에 여름은 커피를, 지음은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여름은 어제 추천한 책에 대한 지음의 생각이 궁금하다. 어제 읽은 책은 어땠어? 괜찮았어? 주인공 친구가 부러웠어요. 그런 어른을 만났다는 사실이. 그 친구는 세상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지음이 너도 가능하지. 비록 책으로 만났다고 해도 어른다운 어른을 만난 건 마찬가지니까. 내가 책에 빠지기 시작한 것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책이 알려주기 때문이었어. 이 책처럼 돌보는 사람을 자주 만날 수 있는 내가 ‘운이 좋은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읽는 사람으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제가 제 삶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는 그랬어. 나의 지금도 괜찮구나, 하는 순간들이 쌓여가기 시작했어. 너도 한 번 시도해 봐. 안 좋은 소식이 다반사인,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번 더 사는'* 걸 가능하게 하는 책 속에서 그렇게 너를 돌보며 부디 너무 오래 아프지 않기를, 무탈하기를 바랄게.
여름은 어린 시절 자신이 듣고 싶던 말을 어른이 된 지금 맘껏 하는 시간이었다. 지음이와 책 이야기를 나누는 어제오늘이 서프라이즈 선물 같았다. 지음이를 다독일 때 여름은 그 시절 어린아이(본인)도 다독여 줄 수 있었다.
여름과 이야기를 나눈 지음은 그만하기로 했다. 좋은 어른을 기다리는 일을. 그리고 자신을 다치게 하는 실망스러운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거나 이해받길 바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책 속에서 기다리던 어른을 만났으니 이제 내가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쉽지 않겠지만.
언니랑 이야기하고 나니까, 우선 나의 마음을 돌보는 글부터 시작해 타인을 돌보는 글을 쓰고 싶어졌어요.
지음이 스스로 맹세하듯이 말했다. 말만 들어도 좋다. 여기서 알바하면서 글 쓰면 안 돼요? 서가 청소도 열심히 할게요?
지음이 <슈렉>에 나오는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좋아! 책은 시간 날 때 틈틈이 봐도 되고 금요일 밤에는 한 주 동안 쓴 글 공유하자. 아싸!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요.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바다를 보며 축하할까?
지음과 뽀야는 아침처럼 나란히 걷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옆에 여름도 함께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바닷가를 걷는 그 셋은 지금 무지 행복해 보인다.
지음아, 언니는 옛날에 스무 살이면 모든 걸 다 아는 어른인 줄 알았다. 근데 서른이 된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근데 ‘밝은 곳으로 가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단 한 사람의 일상에라도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 일이 나의 하루하루가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줘. 너도 꼭 네가 좋아하는 걸 찾았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거... 전 절 이해해 주는 유일한 친구들이 정말 좋아요. 그렇지, 그렇게 너의 일상이 지극히 평범하더라도 다시 보고, 너만의 해석으로 다시 써볼 수 있어. ‘내가 살아 있어서’로 시작하는 문장을. 예를 들면, ‘내가 살아 있어서 지음이랑 뽀야와 함께 바닷가를 마냥 걸을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살아 있어서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요? 그렇지! 너의 마음이 좋아하는 것들, 주로 응시하는 것들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 가능해질 거야. 어른들은 탐탁지 않아 하더라도. 나의 마음도 돌아보고, 좋아하는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구성하고 그 문장이 곧 일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저를 아껴줄게요. 응! 그래도 여전히 너무 힘들면 언제든 나한테 얘기해. 그래도 돼. 너의 마음이 괜찮아지는 게 더뎌도 괜찮아. 책방 문 열고 기다리고 있을게.
여름이 환하게 웃었다.
여름 언니, 언니를 그리고 언니가 운영하는 책방을 만나고, 제 삶을 잘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음도 여름을 따라 환하게 웃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할까?
마숑! 드숑! 비숑!
여름은 맥주를, 지음은 콜라 캔을, 뽀야는 손을 부딪쳤다.
지음은 바다에 일렁이는 찬란한 빛들이 꼭 여름 같다고 생각한다. 그 빛이 지음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게 한다. 자신이 받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볕뉘를 간직해, 나처럼 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정한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돌보는 마음이 담긴 글을 쓰면서 그렇게 천천히 여름을 닮아가면 좋겠다고 뽀야랑 공놀이하는 여름을 보며 지음은 생각한다.
저녁놀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아름다웠다. 지음은 노을 지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세상을 더 나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마음들이 저녁놀 같다고 생각한다.
어제오늘 언니랑 보내고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빠지고 싶지 않을 때 이 날을 두고두고 꺼내볼 거 같아요.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마워.
여름은 '만일 내가 하나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닐 거예요.'라고 말한 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시** 를 떠올리며 반달눈을 하고 웃는다.
내 삶을 헛되지 않게 해줘서.
바닷가 바람을 맞으며 여름과 지음은 심야 책방 오픈 준비를 위해 서둘러 돌아간다. 책방 마스코트 뽀야의 '타닥타닥' 발소리도 들린다.
다녀왔습니다.
지음은 아무도 없는 '책의 바람' 책방 문을 힘차게 열며 자신에게 쉼이 되어주는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응시한다. 좋아하는 책과 책방 주인장 옆에 사랑하는 뽀야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제주 바다까지.
여느 날과 다른, 당연하지 않은 여름날이었다고 지음은 훗날 노트에 적었다.
바람 소리 가득한 책방에 노을이 새겨지기 시작하면, 여전히 뽀야는 창밖을 구경하고 여름과 지음은 좋아하는 책을 마음 놓고 읽으며 책의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책방의 밤을 이어갑니다.
그림, 이유빈
* 신형철, 『인생의 역사』 (난다, 2022), 317.
** 에밀리 디킨슨 시, 원제는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