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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하다 Oct 20. 2023

여름 지음 #1

책방에 머무는 좋은 것들을 가지고 지은 작은 이야기

이 세상 모든 지음이에게,




  회사 다녀올게.

  지음은 오늘도 친구들이랑 헤어지면서 울상을 지은 채 인사건넨다. 친구들은 그런 지음이 웃기다. 그러나 지음은 웃지 않은 채 학교를 벗어나 터벅터벅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지음은 어른들이 회사에 다니기 싫어하는 마음이 자신이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과 비슷할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지음은 자신이 꼭 이방인 같았다. 분명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대화조차 안 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른이 학교에도 집 안에도 없었기 때문일까. 안 보면 그만인 사람들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의 입에서 쏟아진 못된 말들과 그에 맞서 내뱉은 날 선 말들로 지음은 멍들어 갔다.  

  밤 12시. 또다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세상에 밉보인 걸까. 지음은 종종, 자주 이와 같은 생각에 잠긴다. 끼어들면 괜히 불똥 튀기 때문에 지음은 학교에 갔다 와서 풀지 않은 가방을 도로 메고 집을 나선다.


  지음이 도착한 곳은 동네책방이었다. 암흑 같은 제주도 밤을 홀로 밝히는 심야 책방에 들어가니 책방지기의 반려 친구, 뽀야가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며 지음을 반긴다. 지음은 그런 뽀야를 힘껏 안아준다.

  어! 지음이 왔구나, 잘 왔어.

  책방지기 여름이, 서가 정리를 하다가 지음을 반긴다.

  뽀야를 만지작거리던 지음은 여름과 뽀야를 번갈아 보며 자신이 기댈 곳이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힘들고 아픈 누군가가 이 책방에 들러, 추천한 책을 통해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의 바람'으로 지은 여름의 바람처럼 지음은 책방에서 잠깐 쉬었다 나오면 기분도 마음도 나아졌다. 그래서 집이 버거울 때마다 지음은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이 공간에 머문다.

  여름은 지음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느끼지만, 평소처럼 물어볼 뿐이다.

  오늘은 어떤 책을 추천해 줄까?
  제 편이 되어주는 소설을 읽고 싶어요.

  지음이 간절하게 답한다.
  나를 돌봐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책이 있지.

  여름은 웃으며 책을 찾으러 간다.




  여름은 느린 친구다. 또 겁이 많은 친구다. 어린 시절에 여름은 한글 읽는 법, 시계 보는 법, 구구단 외우기 등등 다 늦었다. 겁은 또 많아서 체육활동, 특히 뜀틀은 그냥 시도조차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다 느꼈다. 주변의 답답한 시선들을. 그러다 보니 매사 눈치 보는 친구가 됐다. 빨리빨리 해야 될 거 같았지만 그건 여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그렇다, 현재 진행형으로 쓴 문장이 나타내듯이 여름은 여전히 그런 사람이다. 어린 시절보다 아주 조금 나아진.


  여름은 삶을 즐기지 못하고 망가지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성인이 되니 이제 졸업이 늦은 사람, 취업이 늦은 사람, 성공으로 가는 수순을 밟는 일이 느린 사람이 됐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굉장히 ‘느린 사람’, 돈 그리고 성공과 거리가 먼 사람.   


  삶을 먼저 살아낸 어른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길에서 자꾸 이탈하자, 성에 안 차 나무랐다. 얼른 다시 앞만 보고 달리라고 재촉했다. 눈을 뜨는 것도, 감는 것도 무서운 시간이 계속됐다. 눈앞이 캄캄한 앞날을 어찌할 바를 몰라 아득한 시간들. 이해받지 못하니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이 흘러 여름은 점점 더 못나졌고 예민해졌다.

  그때 만난 정용준 작가님의 책 『내가 말하고 있잖아』 속 문장, 그리고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원장님. 여름은 그 페이지를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았다.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할 순 없는 법이거든.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해선 안 돼. 당연하지. 낼 용기가 없으니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도 이상해. 힘이 있었으면 힘을 냈겠지. 안 그래?(…)
  넌 지금 용기도 없고 힘도 없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너에게 이렇게 말할 거야. 천천히 말해. 차분하게 말해 봐. 떨지 마. 용기를 내!(…)
 하지만 아니잖아. 천천히 말해도 안 되잖아. 차분하게 말해도 어렵잖아. 떨려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해서 떨리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
  사람들은 줄줄 말을 참 잘해. 써도 써도 넘치는 말의 바다 같은 것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어. 플라스틱 수조 같은 곳에 한 모금 정도의 물만 바닥에 남아 있거든.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사람도 있어. 수조가 깨진 사람도 있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사람도 있어.
우리 친구는 말하는 게 왜 힘드니?  어떤 단어가 어렵고 어떤 상황이 두렵니? 걱정 마. 억지로 시키지 않아. 천천히 해 보자. 내가 도와줄게.”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민음사, 2020), 11-13.


  여름은 마지막 문장에 손을 갖다 대고 북마크 스티커를 붙였다. 여름은 이 문장을 건넌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문장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읽고 쓰면서. 어른과 아이 서로 답답한 상황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라니. 그게 가능하다니. 용기가 없고 힘이 없는 친구에게는 용기 내라는 말, 힘내라는 말도 잔인한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징하게 아는 어른. 그런 친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도와줄 테니 천천히 해보자는 어른.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회원 개개인을 천천히 기다려 주는 원장님이 실존 인물이길 바랐다.

  비록 책 속의 인물이지만 여름은, 지음도 단 한 사람의 아픔이라도 이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어른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건넸다.


  나를 살린 이 책이, 드디어 필요한 사람 곁에 머물 수 있을 거 같네. 혹시 다 못 읽으면 집에 가져가도 돼, 선물이야!

  

  여름은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걸 안다. 책방 하길 잘했구나, 싶은 그 순간을.

  우리 스스로를 손상시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더 나아지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님들이 쓴 책들, 그리고 앞으로 쓸 책들이 지켜줄 것을 알고 난 후 여름은 '안온하다'라는 단어의 뜻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를 돌보고자 하는 아름다운 작가님들, 함께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담긴 책을 소중하게 품고 싶어 여름은 책방을 열었다. 이 공간에 오는 손님들이 본인 곁을 지켜줄 다정한 마음들이 담긴 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한 권 한 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람과 책을 잇는 중이다. 날마다 건네는 책 속의 문장들이 누군가에게 가닿아, 밑줄을 그으며 '돌봄'을 받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를 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자신이 받은 돌봄을, 그 온기를 간직한 채, 따듯함을 나눌 줄 아는 사람, 그렇게 자신만의 공간에서 '마음을 쓰는 사람'이자 '돌보는 사람'이 되자고 여름은 책방을 열 때 다짐했다.

  내일 주말이니까 책 보다 자고 갈게요. 문자 남겼어요. 여기서 잔다고. 보지도 않을 테지만.

  지음은 여름이 잔소리하기 전에 덧붙였다.
  그럼, 언제든지.

  여름은 자신이 보던 책으로 시선을 다시 옮기며 말했다.

여름과 지음은 그렇게 각자만의 책 보는 시간을 가졌다. 뽀야도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시간을 보냈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책방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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